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누 (문단 편집) === 중세 ===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 [[북벌]]의 영향으로 이후 에미시들의 귀순과 거주지 이주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소규모의 부락들을 제외하면 도호쿠 지방은 [[야마토 민족]]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다만 [[도호쿠]]보다도 먼저 동화된 [[가고시마현]]의 민속이 [[하야토]]의 문화요소를 일부 계승하는 것처럼[* 가고시마 사투리는 표준 일본어와 굉장히 이질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도호쿠에도 에미시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각종 지명에서 에미시 언어의 흔적이 발견된다. 또한 [[마타기]]라는 수렵민 세력, 그리고 가고시마벤처럼 이질적인 [[도호쿠벤]]은 에미시 문화의 잔재로 여겨진다. [[몽골 제국]]은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80|사할린 아이누가 살던 사할린 섬을 타타르 해협을 건너 1264년, 1284년, 1285년, 1286년에 침공하기도 했다.]] [[원사(역사책)|원사]] 세조본기에 따르면 1만의 병력을 투입했는데, [[몽골 제국군]]은 겨우 2만 병력으로도 [[러시아]] 공국 연합군 8만을 학살했을 정도로 군사력으로는 최강이었던 군대라 당대 기준으로 세계 최강의 정예병이었기 때문에 아이누인들에게는 가히 날벼락이었다. 몽골군은 [[사할린]]을 정복한 후 군사 거점을 확보하고 둔전을 설치하면서 많은 아이누들을 학살했는데, 하필 1287년 몽골 제국 본토에서 대규모 군사반란이 발발하자 사할린에 주둔중이던 몽골군이 반란군들을 진압하기 위해 다시 몽골 제국 본토로 철군하면서 몽골 제국은 곧 사할린 직접 지배를 포기하는 대신 조공 체제로 변경하여 사할린을 간접적으로 지배했다. 비슷한 시기에 했던 몽골 제국군의 [[원나라의 일본원정|쓰시마 · 규슈 침공]]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기 쉽지만, [[원나라]], [[명나라]] 대의 군사 지도를 보면 사할린과 [[홋카이도]], [[혼슈]]가 쭉 이어졌다는 지식이 당시에 부재했다.[* 원의 군사 지도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만 봐도 [[연해주]]와 [[일본 열도]]는 실제로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지만 지도에는 약간 다른 위치로 나온다. 지도에서는 일본 열도가 대륙의 먼 남쪽에, 연해주와 사할린이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다. 이러한 세계적 지리적 인식은 17~18세기 비교적 정교한 세계 지도가 나오는 시점까지 이어졌다.] [[무로마치 시대]]인 [[15세기]] 경 홋카이도 끝자락인 오시마 반도에 일본인들이 도래했다. [[다케다]] 일족의 분파인 카키자키(蠣崎) 가문이 오시마 반도의 [[마츠마에초|마츠마에]]를 거점으로 삼아 다스리기 시작했다. 카키자키 가문은 [[도요토미]] 정권으로부터 이 에조치(蝦夷地, [[에조]]의 땅)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들의 지도 하에 개간된 지역을 통틀어 '와진치'(和人地, [[야마토 민족|화인]]들의 땅)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