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티 (문단 편집) ==== 외세의 간섭 ==== 이를 노리고 과거 [[생도맹그|식민지]] 지배국이었던 [[부르봉 왕정복고|프랑스]]가 [[1825년]] 1억 5천만 [[프랑스 프랑|프랑]][* 참고로 [[루이지애나 구입|1803년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북아메리카 대륙 중부의 광대한 루이지애나를 매입할 당시]] 매입 금액이 1,500만 달러, 약 7,500만 프랑이었다. 물론 당시 루이지애나는 인구가 부족해서 개발에 어려움이 많던 지역이기는 했다.]에 달하는 이른바 '[[근대화]] [[배상금]]'을 청구하고 나섰다. 아이티가 [[독립]]하면서 [[개소리|프랑스인 농장주들의 재산인 농장과 흑인 노예들을 '도둑질'했으니]], 독립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적반하장|배상금을 내놓으라]]는 소리이다. [[아이티 혁명]] 와중에 [[https://en.wikipedia.org/wiki/1804_Haiti_massacre|1804년 백인 부녀자들을 상대로 대규모 강간과 고문, 학살이 일어났던 상황]]이라 국제 [[여론]]이 아이티에게 불리한 점도 있었다.[* 당시에는 [[강간범]]이 [[피해자]]보다 [[빽]]이 좋으면 그러려니 넘어가도, 강간 피해자가 강간범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경우에는 절대 가만 넘어가던 시대가 아니었다. 특히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강간]]하는 경우는 당시 사회 기준으로 죽음 외에는 절대 용납받을 수 없는 대죄였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흑인이 백인 여성을 강간하는 사건이 터지면 대중들이 [[감옥]]에 쳐들어가서 강간한 흑인 남성을 [[사적제재|두들겨 패서 죽이고]] [[복수]] 기념으로 [[축제]]를 벌이는 경우도 많았을 정도였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65016|심지어는 백인들의 횡포에 저항해도 누명을 뒤집어쓰고 집단 린치를 당하며 살해당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가 순순히 독립을 인정할 경우 안 그래도 분위기 어수선했던 프랑스 본토에서 폭동이 거세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프랑스가 [[수도(행정구역)|수도]] [[포르토프랭스]] 앞바다에 [[포함외교|함대를 박아둔 채 협박하고]] 다른 [[열강]]들 모두 프랑스와 결탁하여 아이티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었으니 결국 아이티는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해 1억 5천만 프랑을 5년 안에 갚는다는 불합리한 조약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난한 독립국인 아이티가 단기간 내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채무불이행]]이 반복되면서 혼란이 고조되곤 했으며, 결국 [[1838년]] 프랑스와 아이티는 배상금을 9천만 프랑으로 낮추고 지불기간도 향후 30년으로 늘리기로 합의하였다. 이렇게 프랑스는 아이티의 국가재정을 한 세기 이상 탈탈 털어갔으며 매년 아이티 국가예산의 80%가 배상금 지불 명목으로 프랑스에게 넘어갔다. [[프랑스 정부]]에 대한 배상금 지불은 [[1888년]]에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으나, [[돌려막기|빚을 빚으로 돌려막는 방식]]이었기에 여전히 아이티는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나 [[독일 제국|독일]], [[미국]] 등의 [[은행]]에서 빌린 막대한 대출금과 이자를 갚아나가야 했다. 여전히 남아있는 대출금은 계속해서 긴장관계를 고조시켰으며, [[1903년]]에 아이티 정부가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던 아이티 국립은행을 [[사기죄]]로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아이티 국립은행이라는 이름이지만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프랑스 은행들의 공동투자로 설립되었으며 본사도 파리에 있었다.]]] 이로 인한 갈등이 점점 심해지자 프랑스 은행들은 [[1910년]]에 아이티 국립 은행의 지분 대부분을 미국의 [[씨티은행|뉴욕 시티 은행]]에 넘기고 손을 떼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티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뉴욕 시티 은행과 미국의 [[기업가]]들은 기존의 프랑스 은행들보다도 더 공격적으로 아이티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dIOel6tAgLw)] }}} || 아이티는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며 간신히 무역로를 뚫었으나 [[19세기]] 중후반부터 [[설탕]]과 [[커피]] 재배생산지가 [[카리브 해]] 각지에 늘어나고 설탕 가격이 점점 하락하기 시작했다. 아이티에서는 과거 [[생도맹그|프랑스 식민지]] 시절 [[농장]] 경영 방법을 그대로 물려받아 [[노예제]]를 사실상 부활시킨 데 반해[* 당시 [[프랑스군]]을 몰아내긴 했는데 영토 안에 제대로 돌아갈 만한 경제적 인프라가 [[사탕수수]] 농장들 뿐이었고, 이 농장들은 엄청난 양의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다. 결국 노예제란 단어만 안 썼지, 강제노동법을 만들게 된다.] 영국의 [[바베이도스]] 등 카리브해에서는 생산성에 한계가 있던 노예제 대신에 [[화교|중국계]]·[[인도인|인도계]] [[쿨리|임노동자]]들을 데려와서 설탕을 경작시켰는데 이런 지역들이 아이티보다 생산성이 훨씬 더 높아졌다. 맞기 싫어서 대충 눈치보고 일하는 것과 빚 갚으려고 이 악물고 일하는 것은 생산성이 엄청나게 차이날 수 밖에 없다. 아이티는 생각만큼 설탕 [[수출]]에서 이익이 나지 않자 배상금을 내기 위해 미국과 [[독일 제국|독일]], 갓 독립한 [[라틴아메리카]] 각국 등에서 돈을 빌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아이티는 노예제 완전 청산에는 실패했고, 농업은 몰락했고 경제는 피폐해졌다. 설탕 말고 커피 수출 역시 타격을 입었다. 아이티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초반 독립한, 하지만 국토는 훨씬 거대했던 [[브라질 제국|브라질]]이 본격적으로 커피 재배 산업에 뛰어들면서 [[1820년대]]부로 '''국제 커피 가격이 폭락'''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후에도 [[황제]]를 참칭하는 작자들이 잊을 만하면 등장했다. 그리고 옛 주인 프랑스나 머리 위의 신흥 초강대국 미국, 카리브에서 껌 좀 씹던 영국 같은 대국들의 압박 등은 아이티 사람들의 등골을 휘게 했다. [[1843년]]부터 [[1915년]]까지 22명의 [[아이티 대통령|대통령]]이 재임했는데, 이 중 21명이 암살당하거나 쫓겨나는 [[로마 제국|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나 [[신라]] 후기의 왕위 쟁탈전 못지 않은 개막장 권력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 제7대 대통령이었던 [[포스탱 엘리 술루크]](Faustin-Élie Soulouque)는 [[1849년]]에 [[장 자크 데살린]]이 했던 것처럼 [[아이티 제2제국|아이티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포스탱 1세]]로 즉위했다가 재위 10년만인 [[1859년]]에 축출되었다.([[아이티 제2제국]])] 물론 그동안 아이티는 있는 것도 다 말아먹고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나라꼴은 엉망이면서도 의외로 19세기 독립 이후 한동안 어설프게나마 [[지역강국|지역 열강]] 행세했던 적도 있다. 옆동네 현재는 [[도미니카 공화국]]이 된 당시 [[스페인 아이티 공화국]]을 집어 먹어 수십년간 통치하며, 바다 건너 [[쿠바 도독령|스페인령 쿠바]]·[[푸에르토리코]]나 영국령 [[자메이카]]의 식민지 당국이 한동안 아이티가 쳐들어와 자국 내 노예들과 함께 싸그리 다 죽이고 먹어 버리는게 아닐까 겁먹기도 했다. 신생국 [[멕시코]]도 [[유카탄]]에 자꾸 아이티인들이 드나들자 경계하여 해안선 방어를 강화하기도 했다. 독립 직후부터 빚잔치에 권력 투쟁으로 엉망이었던 나라가 지역열강 흉내낼 역량은 또 어디에 있었냐 하면, 이 때만 하더라도 당장 돈은 없지만 어쨌든 세계 최강의 [[나폴레옹]]의 군대에 맞서 싸우며 단련되었던 강력한 군사적 재원은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상드르 페시옹|페시옹]], [[앙리 크리스토프|크리스토프]], 부아예 같은 군인 출신 정치인들은 정적에 맞서 싸우려면 군대가 필요하니 경제 상황은 파탄이면서도 군대 하나만은 강력하게 유지하려고 들었고, 스페인령 아이티의 수도인 [[산토도밍고]]는 당시만 해도 아이티 인구의 1/8 정도 수준 밖에 안됐기 때문에 어쨌든 당장 주어진 여건만 보면 한주먹거리였던 상황이었다. 이래서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스페인 아이티 공화국]]을 처음에는 어느 정도는 자발적인 연합형태로 먹었는데, 막상 알맹이를 까보니 아이티 측은 이전 [[제국주의]] 국가들의 못된 짓은 그대로 배웠는지 프랑스가 악랄하게 아이티에 물린 빚을 갚기 위해 도미니카인들을 착취하여 뜯어 내려고 했고, 이에 반발하여 도미니카인들은 10여년간의 독립전쟁 끝에 1844년 2월 27일 아이티를 몰아내어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독립하는 걸로 끝이 났다. 그리고 아이티는 도미니카를 상실하자 안 그래도 악조건에서 시작했던 국가 역량이 그대로 폭삭 무너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