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케나톤 (문단 편집) === 아마르나 문서 === [[파일:Five_Amarna_letters_on_display_at_the_British_Museum,_LondonA.jpg]]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아마르나 문서의 일부. 아마르나 시대의 국제 정세는 19세기 후반 즈음에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에 굉장히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총 382개의 토판으로 구성된 아마르나 문서란 외교, 교육,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주된 내용은 [[아멘호테프 3세]]. 아케나톤, [[투탕카멘]] 등의 역대 파라오들이 [[미탄니]], [[시리아]], [[카시트 왕조|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는 하나의 단일 왕조가 아니다. [[바빌론]]을 중심으로 번영하던 국가를 그냥 모두 바빌로니아로 통칭해서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함무라비]]의 바빌로니아는 '바빌론 제1왕조'고, [[이슈타르의 문]]으로 유명한 바빌로니아는 '바빌론 제10왕조'로 부르는 등 여러 왕조들이 존재했다. 이 당시의 바빌로니아는 [[카시트 왕조]]라고 불리는 '바빌론 제3왕조'다.] [[히타이트]], [[아시리아]], 그리고 여러 봉신국들과 나눈 외교 서간들이다. 아마르나 문서를 보면 당시 아케나톤 시대의 이집트와 [[중동]]의 정세를 짐작할 수 있다. 아케나톤이 즉위하기 약 200년 전,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인을 몰아내고 [[이집트 제2중간기|제2중간기]]를 종결했다. 힉소스인들을 몰아내 세가 오른 이집트인들은 [[하트셉수트]], [[투트모세 3세]] 시대에 중동 권역으로 빠르게 영향력을 확장하며 패권국으로 군림했고, 이 과정에서 중동 지방의 전통적인 강대국인 미탄니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는 미탄니와의 적대보다는 공존을 선택했다. [[아멘호테프 3세]]는 미탄니와의 결혼 동맹, 그리고 봉신국 설치 등을 통해서 중동 인근의 국경을 안정시켰고, 이 덕분에 중동은 오랜 기간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아케나톤의 시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리아 지방에서 신흥 강대국인 [[히타이트]]가 발흥, 미탄니를 꺾고 중동 지방을 집어 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히타이트의 왕 수필룰리우마 1세는 미탄니를 공격해 투쉬라타 왕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중동의 국제 질서는 완전히 붕괴했다. 수많은 봉신국과 도시들이 무너져가는 미탄니에서 떠오르는 히타이트로 줄을 갈아탔고, 바로 근처에 있던 이집트의 봉신국들은 당연히 동요하거나 심지어는 히타이트에 충성을 맹세하기까지 했다. 아케나톤 역시 재위 초반에는 히타이트 제국의 성장에 큰 경계심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정작 군사적 행동은 거의 취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비블로스]]의 왕이자 이집트의 동맹국 군주였던 리브-하다는 히타이트의 공격을 받자 아케나톤에게 60차례 넘게 편지를 보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읍소했다. 그러나 아케나톤은 이를 냉정히 거절했고, 결국 리브-하다는 무너져 내렸다.[* 이때 아케나톤은 '''"니가 보내는 편지 수가 우리나라 신하들이 보내는 편지 수보다 많으니까 그만 좀 보내라"'''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리브-하다는 혼자서 비블로스를 되찾기 위해 분투하다가 잡혀 죽었다.] 다른 동맹국이나 봉신국들도 거의 엇비슷해서 히타이트는 이집트와 직접적인 충돌 없이 빠르게 몸집을 불려나갈 수 있었다. 아케나톤은 이렇게 파병이나 원조를 요청하는 요구들 대부분을 묵살했다. 이집트의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급격히 수축했고 반대급부로 히타이트의 영향력은 크게 늘어났다. [[19세기]], 그리고 [[20세기]]의 이집트학 학자들은 아케나톤의 전쟁을 회피하는 태도 때문에 히타이트가 지나치게 성장해버렸다고 크게 비판했다. 평화를 좋아하는 파라오 때문에 히타이트를 조기에 찍어누를 기회를 놓치며 이집트가 이후 백 여년 넘게 히타이트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 당시의 학계의 주류 의견은 안 그래도 온건한 성향의 파라오가 종교 개혁 따위에 몰두하다가 결국 히타이트의 성장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헨리 홀은 '평화에 집착하다가 베테랑 군사 전문가 몇 명이면 될 일을 망쳐 후세에 큰 혼란을 남긴 인물'이라고 혹평했고, 헨리 브레스테드는 '급변하는 당시 중동 정세에는 걸맞지 못했던 인물'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표면적인 평화에 미쳐서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는 조금씩 평가가 바뀌고 있다. 점차 아케나톤이 여러 차례 파병군을 파견하고 중동 정세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증거가 드러나고 있으며, [[가나안]] 등지에서 이집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아케나톤의 외교가 실패로 여겨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 만일 아케나톤이 외교에 아예 신경을 끊고 자신들을 방치한다고 생각했다면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케나톤은 봉신국들에 공문을 발송해 대비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케나톤의 외교를 미화하려는 것 역시 아니다. 분명 아케나톤은 히타이트의 부상을 제지하는 데에 실패했고, 후임 파라오들은 종교 개혁의 뒤처리에 온 힘을 쏟느라 히타이트를 제대로 견제하지도 못했으니 아케나톤이 외교적으로 실책을 저지른 것만은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