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케나톤 (문단 편집) == 평가 == 아케나톤이 이러한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던 사제 계급을 일소하고 권력을 파라오에게 집중시키고자 하는 의도였으리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는 [[거위]] 그림, '어머니'라는 말 등을 금지시켰는데 거위는 아멘호테프의 사자를 상징했고 '어머니'라는 말은 아멘호테프의 아내 무트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를 [[공포정치]]기로 보기도 한다. 19세기 [[서유럽]]에서 고대 이집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아케나톤이 처음 재발굴되었을 때부터는 아케나톤을 정체된 국가를 개혁하려다 실패한 비운의 왕으로 동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 사조의 영향이 크지만, 아마르나 개혁이 일신교를 주창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문화상대주의]]가 자리잡지 못한 19세기에는 유럽의 일신교를 우월하다고 보는 시각이 강했다. 이러한 시각은 아케나톤이 아텐 신앙과 [[평화주의]]를 탐닉해 기본적으로 정복 왕조 성격을 가진 제국인 이집트를 약체화시킴으로써 [[히타이트]] 등 외세의 세력 확장을 방조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또한 아마르나 개혁의 본론도, 기존의 사제 계층을 분노시켰을 뿐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남겨둠으로서 제대로 된 왕권 강화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그가 죽자마자 기존 신앙이 다시 회복되어버렸다는 점 등을 들어, 심하게는 어떤 실질적 목적으로 이뤄진 개혁이 아니라 파라오 개인의 변덕에 불과했다고 분석하는 견해까지도 있다.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가 집필한 '고대 이집트의 역사'에 의하면, 아케나톤은 파라오의 권위를 강화하려고만 했을 뿐 정작 그렇게 높은 권위를 민생에 쓰려고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조각상에 남아 있는 모습이 워낙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보니, 그의 이단아적인 행동이 [[유전]]적 기형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2010년]] 아케나톤의 것으로 판명된 [[미라]]를 연구해본 결과 정신이상을 의심할 만한 심각한 [[유전병]]의 징후는 발견되지 읺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