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키히토 (문단 편집) == 대한민국 관련 발언 == 아키히토는 [[일제강점기|식민지배]]나 [[전범]]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사과 같은 [[평화주의]]적 언행 외에도 대한민국 관련한 친화적 발언을 꽤나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들을 반성하고 크게 뉘우치고 있으며 총리 [[아베 신조]]에게 후손들을 위해서 바른 역사를 가르치라고 일침을 날리기도 했고 "미래를 위해서라도 과거의 전쟁을 반성해야 한다"고 할 정도면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아베 신조가 "그냥 기도나 하고 있으라"고 하는 등, [[아베 신조]]하고 사이는 그렇게 썩 좋진 않았다. 일본의 [[간무 덴노]](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의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했는데, 일본의 우익 세력들이나 혐한세력들은 당연히 이 발언을 듣고 당시 [[천황]]이였던 아키히토를 비난하고 싫어할 정도이다.[* 막상 이 간무 덴노의 친모 고야신립은 황실 내에서 서열이 낮았다.] [[대한민국 대통령/명단|역대 한국 대통령]] 중 아키히토와 회담한 인물은 2019년 기준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이렇게 5명이다. 1990년 5월, 일본을 공식 방문한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과의 대화 때 [[http://www.nocutnews.co.kr/news/747999|''저의 가계를 살펴보면 모계에 한국계 인물이 있는 것 같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국빈 방문시 만찬에서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2005188_19498.html|"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여러분께 큰 고통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습니다"]]라고 발언했다.[[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2005187_19498.html|#]] 2001년 12월 23일, 68세의 생일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선 직접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덴노]]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https://mnews.sbs.co.kr/news/endPage.do?newsId=N0311173733|발언했다]] [[http://mn.kbs.co.kr/mobile/news/view.do?ncd=3312626|#]].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는 아키히토의 발언 때문에 혐한 넷 우익들을 비꼬는 표현을 쓸 때 "[[한국]] 형님"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https://www.instiz.net/pt/5710231|#]] >일본과 한국 사람들 사이에는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고 『일본서기』 등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과 초빙되어 온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문화와 기술이 전해졌습니다. 궁내청(宮內廳) 악부(樂部)의 악사들 중에는 당시에 이주해 온 사람의 자손으로 대대로 악사 일에 종사하며 지금도 때때로 아악을 연주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와 기술이 일본 사람들의 열의와 한국 사람들의 우호적 태도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령왕은 일본과 관계가 깊었고, 이때 이래로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빙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과의 교류는 이러한 교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21|#]] 다만 [[아사히신문]] 등이 이 대목을 보도한 것과 달리, 주로 일본의 보수 성향 언론들은 이날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도 아키히토의 이 발언은 쏙 빼놓기도 했다. 2013년 [[나라현]]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도 같은 발언을 했다. [[http://blog.cctoday.co.kr/11620|"'속일본기'에 의하면 간무일왕 생모는 백제 무령왕을 선조로 여기는 백제 도래인(渡來人)의 자손이다"]] 참고로 언급한 [[간무 덴노]]는 나라현에서 [[교토부|교토]]로 수도를 옮기고 [[헤이안 시대]](794~1185년, 교토 시대)를 연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좀 더 들여다보자면 간무가 편찬한 '[[속일본기]]'(789년)는 이렇게 전한다. >황태후의 성은 화(和·야마토)씨이고[* [[https://blog.naver.com/sohoja/50094090488|신찬성씨록]] 779번에 나오는 성씨가 백제계 화(和:야마토)다. 일본에서는 5품 이상의 성 뒤에 아손(朝臣)이라는 경칭을 붙여 야마토노아손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신립(新笠·니이카사)이다. (…)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다.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 고닌(光仁) 천황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하여 맞아들였다. (…) 백제의 먼 조상인 [[동명성왕|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백제]]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주몽이라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http://news.donga.com/3/all/20150625/72099968/1|출처]] > >皇太后 姓; 和氏, 諱; 新笠. (…) 后先出自百濟武寧王之子純陀太子. 皇后容徳淑茂 夙著聲譽. 天宗高紹天皇龍潛之日 娉而納焉. (…) 其百濟遠祖都慕王者 河伯之女感日精而所生 皇太后卽其後也. [[https://blog.naver.com/sohoja/50044937169|출처]] [[간무 덴노]]의 아버지는 [[코닌 덴노]](光仁天皇)로 할아버지 대에 '황위 쟁탈전'에서 패배하여 황위 계승이 어려웠던 인물이다. 그때, 만난 여인의 이름은 화신립(和新笠)으로 [[백제]] [[무령왕]]의 10대손으로 멸망한 백제 왕실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61세에 천황이 된 코닌은 신립을 정실로 삼아 고야(高野: 타카노노)씨를 사성했기에 고야신립(高野新笠: 타카노노 니이가사)으로도 불리며 이들 사이에 난 아들 간무를 황태자로 삼는다. 789년 신립이 세상을 떠나자 간무 천황은 어머니를 태황태후로 추증하고 히라노 신사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냈다. 간무는 즉위 동안 백제 왕족의 후손들을 찾아가 제사 지내고 이들에게 5위 이상의 관위를 내리거나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에 임용하였다.[[http://www.chungnam.go.kr/multi/multiMedia.do?article_no=MD0000926353&med_action=view&email_addr=ktx@korea.kr&mnu_cd=CNNMENU01149&orderby=REG_DATE|출처]] 이는 [[정략결혼]]을 한 아버지와 간무 자신이 백제 무령왕 혈통임을 내세워 황권을 강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코닌이 즉위할 때 정실은 이후 황후였고, 그 아들인 오사베가 황태자로 책봉되지만 이들은 불과 몇 달 후에 폐위되고 사망한다. 신립 소생이던 간무에게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코닌의 자식은 5남 7녀였는데, [[후지와라]] 가문은 간무를 내세운다. 반대측이 적통성을 문제삼자 "내 어머니는 백제의 왕족"이란 말로 이를 잠재우고, 간무는 황태자에, 어머니는 황후에 책봉된다. 간무가 속일본기를 편찬하여 화신립에 대해 서술할 때 [[동명성왕]]의 출생까지 거론한 것은 무령왕은 [[온조왕]]의 후손이며 온조는 천제의 아들이자 하백의 외손자인 주몽의 아들이니 곧 간무 자신이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나타낸다. 그동안 천황가가 백제계와 관련있다는 학설은 일부 학자들에게서만 나올 뿐이었다. 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는 천황가의 시조가 백제계 도래인이라 하였고[[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0/08/19/2010081900044.html|#]] 이노우에 미쓰사다 도쿄대 교수는 칠지도를 받은 오진천황은 백제왕족이며 천황가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일본 이주자라고 하였다.[[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925|#]] 아키히토의 이 발언으로 일본의 일부 [[우익]]들은 충격을 받았는지, 이후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인들이 차지한 한반도" 운운하며 "지금의 한반도는 백제와 무관한 나라"라는 망언을 일삼았다. 그런데 아키히토보다 한술 더 뜬 사람은 일본 황실이 조선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에가미 나미오의 학설에 천황가의 풍습이 한반도와 비슷한 점을 소개하며 동의했던 아버지 [[쇼와 덴노]]다. 어머니를 "오모"라고 부른다는 점, 일본 특유의 정좌 자세가 아닌 양반다리를 한다는 점, 젓가락을 잘 쓰지 않고 숟가락을 사용한다는 점(일본은 밥도 젓가락으로 먹는 등 젓가락 문화가 더 보편적이다), 떡을 [[시루]]에 쪄서 먹는다는 점(시루는 한국 고유의 찜기이다), 후식으로 차 대신 [[숭늉]]을 마신다는 점, 마늘이 요리에 자주 사용된다는(일본은 마늘을 식용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다) 점이다. 2005년 [[사이판]] 방문 당시엔 '태평양조선인평화탑'(太平洋朝鮮人平和塔)에 참배했다. [[궁내청]] 관계자들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고 했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09/2016080900265.html?Dep0=twitter&d=201608090|#]] 2017년 9월 20일엔 아키히토와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후]] 부부가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있는 [[고마 신사]][*高麗神社 주변에는 [[세이부 철도]]의 [[코마역(사이타마)|코마역]]이 있으며, 역전에 장승이 있다.]를 방문했다. 역대 천황 가운데 고마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아키히토가 처음이라고 한다. 고마신사는 1300여년 전 [[고구려]]가 멸망하자 일본으로 건너온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이자 도래인인 약광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신사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아키히토 천황이 퇴위하기 전에 일본 내에서 고구려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는 고마신사를 방문함으로써, 한국에게 반성과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를 내비쳤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9/20/0200000000AKR20170920094500073.HTML?input=1195m|#]] 신사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신사를 둘러보던 아키히토가 "[[고구려]]는 몇 년에 멸망했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황태자]] 시절이던 1988년 9월 당시 [[일본 외무성]]의 무라타 료헤이(村田良平) 사무차관이 이원종 주일대사와의 비공식 협의에서 '아키히토 황태자의 조속한 한국 방문이 실현되길 기대한다'는 일본 입장을 전달했고, 이 대사가 이를 본부에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 외무대신이 1986년 3월 아키히토 황태자 부부의 방한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으나, 그해 8월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태자비]]의 건강 문제 등으로 방한 계획이 보류됐었다.[[https://www.yna.co.kr/view/AKR20190331030300073?input=1195m|#]] 다만, 황태자 시절에 방한했던 이력이 있는 듯하나 이는 오해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0QIdXfVFgQ&ab_channel=Philipjeong|관련영상]]12분 22초의 이방자 여사 작품전에 방문했던 내용의 자료화면과 설명이 있는데, 해당 작품전은 1982년 도쿄의 [[미츠코시 이세탄|미츠코시]] 백화점 니혼바시 본점에서 열렸으며, 여기에 아키히토 황태자, 미치코 황태자비, [[유리코 비]], [[세츠코 비]] 및 [[노리히토]] 친왕이 방문하였던 것이다.[[https://www.ha-jw.com/memorial/inori_museum/%E3%80%8C%E6%B5%81%E3%82%8C%E3%81%AE%E3%81%BE%E3%81%BE%E3%81%AB%E3%80%8D%E6%9D%8E%E6%96%B9%E5%AD%90-%E6%82%B2%E9%81%8B%E3%81%AE%E7%8E%8B%E5%A6%83/|#]] 2020년 공개된 외교문서에서도 첫 해외방문을 한국으로 고려했다는 것이다.[[https://n.news.naver.com/article/079/0003343048|#]] 하지만 한국에서 과거사 청산 요구에 수반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고, 일본은 보수 우경화 흐름이 강해지면서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