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키히토 (문단 편집) == 평화주의자 == 역사관, 정치관은 밑에 쓰여있는 발언들에서 알 수 있듯이 호헌파, [[반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과거 침략을 부인하거나 미화하는 행위는 하지 않으며, [[평화헌법]]의 가치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발언은 아래와 같다. > "우리 국민은 다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깊은 [[반성]]과 [[평화]]국가가 되겠다는 굳은 결의를 했다." (1992년 10월, 중일 수교 20주년을 맞이하며 [[베이징]] 방문 때) > "'''[[일제강점기|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지대한 고통을 주었다]]는 깊은 슬픔이 항상 내 기억 속에 있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 방일 만찬 때)[[https://imnews.imbc.com/replay/1998/nwdesk/article/2005188_30723.html|아키히토 일본국왕 발언]][[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2005187_19498.html|일본 국왕 김 대통령 초청 만찬서 한국 고통 사과]] > "[[대일본제국 헌법|제국헌법]] 시대 천황의 지위와 비교하면, '''[[일본국 헌법|현행 헌법]] 하의 천황의 지위가 오랜 역사에서 볼 때 전통적인 천황의 지위에 맞다고 본다.'''"(2009년 4월, 결혼 5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8&aid=0002153095|#]] > (일본에 장래에 대한 걱정이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오히려 걱정인 것은 '''차츰 과거 역사가 잊혀지는 것이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말도 못하는 고생과 희생 위에 지금의 일본이 세워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__[[베이비 붐 세대#s-4|전후 태어난 사람들]]에게 제대로 (역사를) 전달해 나가는 것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__'''" (2009년 11월, 즉위 20주년을 하루 앞두고.) >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려 하고 있는 오늘, __일본이 지나온 역사를 반복해 배워서 평화를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__"''' (2011년 12월 23일, 생일 기념 감상문을 통해서) > "전후 [[GHQ|연합군최고사령부,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으로 삼아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다양한 개혁을 실시해 오늘의 일본을 일궜다." (2013년 12월 23일, 팔순을 맞아 발표한 인사말 중에서) > "'''[[만주사변]][[태평양 전쟁|으로 시작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우고''', 앞으로 일본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무척 중요하다." (2015년 1월 1일, [[궁내청]]을 통한 신년사에서) > "전쟁 후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진 평화로운 세월을 회상하고 이를 되돌아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간곡히 기원하며…'''" (2018년 8월 15일 [[https://www.nikkei.com/article/DGXMZO34167800V10C18A8000000/|임기 마지막 전국 전몰자 추모식에서]]) [anchor(통석의 염)]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방일 당시, "통석의 염(痛惜の念)을 금할 수 없다"란 말도 아키히토가 한 말이다. 그런데 이른바 "통일운동가"라는 정경모는 이것을 [[백제]]의 [[아신왕]]에게 [[광개토대왕]]이 쓴 표현이란 이유로 "내 땅인데 지금 못 되찾아서 아쉽다"라는 뉘앙스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http://www.hani.co.kr/arti/SERIES/185/388427.html|#]] 그런데 설령 이게 사실이라도 직역 자체는 "유감이다"로 해석되는 것으로 보아 아키히토가 영토 수복의 의미를 쓴 건 아닌 것 같다(정경모도 [[세지마 류조]]의 개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애초에 아키히토의 평상시 발언만 봐도 "내 땅인데 지금 못 되찾아서 아쉽다"란 뉘앙스랑은 좀 안 맞는다. 이런 시각은 일본의 극우적인 사상과는 전혀 맞지 않다. [[아신왕]]은 [[고구려]]와 전쟁을 한 결과 졌고, 패배자의 입장에서 승자에게 한 말로 일본은 한국과 싸움을 했다고 생각조차 안 한다. 실제로 아키히토는 즉위 이후 단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적이 없다'''. 극우 세력은 꾸준히 참배를 권유하고 있지만, 아키히토는 '''[[무시|이에 대해 일체 함구 중]]'''이다. 결국 위 발언들도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지위를 의식해 표현을 다소 완곡하게 했을 뿐이지, 실제 아키히토의 성향은 반(反) 극우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어린 시절 생생히 겪은 전쟁의 아픈 기억(지독하고도 처절한 전쟁의 참상과 비참함 그리고 죽음의 공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1살 때이던 1944년, 그 초등학생 나이에 몇 달 동안 [[일본 본토 공습|연합군 작전으로 퍼부어진 전국 대공습]], 어뢰작전으로 인한 사람들의 대규모 아사, 원자폭탄이 낳은 철저한 파괴라는 ''''전쟁의 비참함''''과 [[방공호]]에 몇 달 간 틀어박히며 전쟁이 끝나기를 숨죽여 기다려야만 했던 ''''압도적인 공포''''까지,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그 자체로 두려운 것인지를 어린 나이에 생생히, 정말 처절하게 실감해야만 했다. 처음 [[도쿄 대공습]]이 끝난 직후 천황과 황족들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천황에게 "현인신이라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냐"며 원망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린 나이에 그러한 참상과 원망이 충격이 되었을 것은 당연지사다. 또 같은 해 방공호에서 피난생활을 할 당시에는 군대의 참모 부관에게서 '''[[카미카제]]'''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 [[뻘짓|'''"그럼 그저 병력을 소모하는 것뿐 아닙니까?"''']]라고 물어서 기고만장하던 일본군 부관의 입을 다물게 하는 등 사람 목숨을 버러지 취급하던 [[일본군]]의 잔혹함과 어리석음도 직접 보아온 것이다. 이러니 극우들의 주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는 전쟁세대로서 누구보다 잘 아는 셈이다. 2011년 3월 15일,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동일본 대지진]]과 관련한 영상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메시지가 방송되는 도중 긴급 뉴스가 발생하면 [[아키히토|저를]] 생각하지 말고 메시지 방송을 중단하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TV 도쿄]]는 천황 폐하의 담화든 뭐든 개의치 않고 정규방송을 돌렸는데 그 소식을 듣고도 "문제없다"며 넘어갔다고 한다. || [[파일:attachment/72765_39760_2824.jpg|width=100%]] || || 제일 왼쪽에 [[아베 신조]] 총리가 보인다. || 2013년 4월 28일, [[아베 신조]] 총리가 주도하여 '주권 회복의 날'(ご主権回復の日)을 일본 내각이 주관하는 정부 행사로 격상하였다. 이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GHQ|미군정 체제]]를 벗어난 것을(주권 회복) 기념함과 동시에, 미군정 때 만들어진 현행 [[일본 헌법|일본국 헌법]]도 개정해야 한다는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 행사인만큼 내각이 참석을 요청하면 천황으로서도 실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 참석한 아키히토는 '''행사 내내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행사 폐막 직후 퇴장하는 도중 참석자들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 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치자 사뭇 당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짓을 하면 할수록 [[일본 황실]]까지 덩달아 이미지가 안 좋아진다. 아키히토의 아버지 [[쇼와 덴노|히로히토]]조차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이 천황의 동의 없이 멋대로 합사되자 '''매우 불쾌해하며 이후로는 참배는커녕 근처에도 안 갔다.''' 히로히토 본인이 전쟁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논하기 이전에, 일단 전쟁의 진행 및 결과가 히로히토가 제위에서 물러날 뻔한(심하면 본인 목숨은 물론 왕실 전체가 날아갈 뻔한) 과거를 겪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반응이 정상적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A급 전범 합사 이전에는 8번 정도 참배했다. [[야스쿠니 신사]]는 A급 전범이 합사되기 전까지는 한국의 현충원과 비슷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황실의 일원으로서 참배가 당연했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그는 오히려 합사 이후의 야스쿠니 신사를 싫어했을 것이다. 강제든 타의든 국가를 위해 죽은 이들을 모시는 장소에 오히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종국에는 패배로 이끈 이들을 같이 영웅으로 모시자고 강제로 합사한다니... 그러므로 내심 [[일본국 헌법|평화헌법]]을 유지하려는 아키히토 입장에서 이 날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덴노 헤이카 반자이'도 얼핏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를 내세워 본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간신배]]들의 속셈이 뻔한데 아키히토 입장에서 유쾌할 리가 없다. 간신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게, 내각은 [[천황]]이 임명하므로 형식적으로 신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본 내의 매우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된다. 현재 언론은 [[아베 신조]]의 개헌 중에서 [[자위대]] 관련된 부분만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국가원수로 명문화되지는 않은 천황을 '''개정 헌법에서 다시금 일본국의 국가원수로 명문화하려 하고 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천황을 일본의 상징으로 삼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이를 휘두르던 [[군국주의]]자들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이쪽 안은 불행 중 다행으로 자민당과 [[연립정부]]인 [[공명당]]의 결사 반대로 빠지긴 했다. 위와 같은 일련의 일들로 인하여, 아베 신조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총리]]와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천황은 신임 총리가 취임하면, 공무 외에도 개인적으로 [[고쿄]]에 초청해서 만찬을 베푸는 전통이 있는데, 아베는 [[헤이세이 시대|아키히토 재위]] 기간 내내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이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어쩔 수 없어도 사적으로는 아베와 교류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로 보인다. 일본 내 극좌파들도 천황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심심하면 주장하지만, 아키히토 개인의 인격에 대해선 비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쇼와 덴노]]를 전범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말이다. 이들도 아키히토와 나루히토 부자의 인격은 칭송하기 때문에 천황제 폐지 주장도 즉각 폐지보다는 남성 황족들의 씨가 말라서 천황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까지 유보하자는 입장이 주류다. 2013년, [[야마모토 타로]]가 초선 의원이던 시절 [[원자력 발전소]] 관련 문제 등으로 [[고쿄]]에서 열린 행사에서 편지를 건넨 적이 있는데, 야마모토의 안전을 위해서 읽지 않고 바로 시종장에게 넘겼다. 만약 읽었으면 야마모토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일본의 상징이지만, 정치적인 권력은 극도로 제한된 일본 천황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천황이 왜 편지를 즉석에서 보거나 자신이 갖지 않고 시종장에게 편지를 넘긴 게 현명한 판단이냐 하면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 덴노를 정치적인 논란에 끌어들이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편지의 내용은 원자력 발전소 문제에 관심을 써달라고 하는 일반적인 내용만 들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패전 70년을 맞이해 [[쇼와 덴노]]의 항복 선언 녹음([[옥음방송]]) 원판 사진과 고음질 디지털 녹음본을 2015년 8월 1일에 전격 공개했다. [[http://www.sankei.com/life/news/150801/lif1508010010-n1.html|#(일본어)]] [[http://www.sankei.com/module/edit/mp3/19450815.mp3|mp3]] 천황 일가의 굴욕이라고도 볼 수 있는 항복 녹음([[옥음방송]]^^종전조서^^)을 디지털로 세심하게 복원해 공개한 것은 아베 신조 정권의 우경화를 반대하는 아키히토의 의중이 반영되었다는 해석이다. 즉, "전쟁의 참상을 잊지 말고 돌아보면서 반성하자"는 것이다. 참고로 이 원본을 이용한 디지털 녹음본이 공개되기 이전의 항복 선언 녹음본은 음질이 매우 열악했다.(자세한 것은 [[옥음방송]] 문서를 참조) 하지만 한국에서는 예전보다는 나아졌을지언정 일부에서는 여전히 평가를 박하게 보는 경향이 좀 있다. 이는 한국 내의 정서적인 역할도 있으나, 대중매체에 의한 문제도 있다. 언론사에선 발행 부수 증가와 정치적 이득과 국민 정서와 조회수 유도를 위하여 일부러 자극적으로 기사를 내는 경우가 많은데, [[기레기/문제점#s-6|아키히토의 선행이나 일본의 선행은 잘 알리지 않으나 자국 내의 혐한 단체는 아주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행동]]들이 다음과 같은 사례다. 후술할 1992년 [[MBC]] 특별기획 <분노의 왕국>의 천황 암살 미수 장면 파문 외에도 [[한일 무역 분쟁]] 초기에는 아키히토를 무슨 1980년대 반공물에 나오는 [[김일성]]마냥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전단지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정작 아키히토는 한일 무역 분쟁의 진짜 주범인 [[아베 신조]]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고수하는 [[평화주의자]]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단지 국가의 상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다짜고짜 비난부터 가하는 것은 상당히 무례한 행동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도 1990년대 말부터는 일본 문화 개방과 [[인터넷]]의 대중화로 진면목이 꽤 알려졌는지 [[까임방지권|영구까방권]] 비슷한 것을 얻어, 그와 관련된 뉴스의 댓글 창에도 긍정적인 댓글이 많이 올라온다. 한국 포털사이트들의 뉴스 댓글들이 꽤나 과격하고 저질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례적인 경우다. 국내에서의 천황의 이미지가 좋아지다 보니, 아베가 한국에서 까일만한 일을 했을 때 뉴스 댓글창에 '덴노 헤이카 반자이'로 도배되는 기이한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