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파르트헤이트 (문단 편집) == 개요 == >'''제 존재 자체가 범죄였습니다.''' >---- >[[트레버 노아]], 남아공 출신의 코미디언으로 스위스계 아버지와 코사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다.[* 아파르트헤이트 당시에는 부모님 두 명이 같이 다닐 수는 당연히 없었고 어머니와 손을 잡고 걸어다니다 경찰이 보이면 바로 손을 놓고 서로 모르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본인은 "마치 [[대마초]] 한 봉지가 된 기분이었죠"라고 회상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남아프리카식 영어로는 '아파테이드' 라고 발음하며 미국/영국식 영어로는 '아파타이트'라고 발음한다.]는 [[아프리칸스어]]로 분리, 격리를 뜻하며 [[냉전]] 시기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당(남아프리카 공화국)|국민당]] 정권이 실시한 [[인종차별]] 정책을 말한다. 인종 간의 실질적인 [[신분제도]]를 설정한 정책으로 '''"백인과 흑인을 격리하는 것과 차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라는 논리에서 시작했지만[* 이런 아이디어는 '분리하되 동등한(Separate but Equal)'이라고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유지한 적이 있었고 20세기 초반에는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심지어 저 판결이 나왔을 때 반대했던 사람은 존 마셜 할란이라는 사람 딱 한 명밖에 없었다.(9명 중 8명 찬성, 1명 반대) 그러나 현실에서 인종 분리는 곧 차별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을 받았고 결정적으로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에서 판례가 뒤집혔고 위헌 판결을 받아 폐지되었다.] 그 본질은 차별을 위한 정책이었다. 말이 분리지 유색인이 이용하는 시설들은 늘 백인들이 쓰는 것보다 열악하고 비위생적이었던 게 현실이었다. 여하튼 이 정책으로 인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이 정책을 실시, 고수하던 1960년대에서 1970~80년대까지 바로 이웃한 국가이자 모국과 똑같이 소수의 유럽계 백인 이주민의 후손들이 정권을 차지하며 다수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억누르던 [[로디지아]]와 함께 국제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척받아 고립되었다. 남아공의 [[노벨상]] 수상자 9명 가운데 6명[* 앨버트 루툴리([[노벨평화상]], [[1960년]]), [[데즈먼드 투투]](노벨평화상, [[1984년]]), [[나딘 고디머]]([[노벨 문학상]], [[1991년]]), [[넬슨 만델라]] & [[F. W. 더클레르크]]([[노벨평화상]] 공동, [[1993년]]), [[존 맥스웰 쿳시]](노벨 문학상, [[2003년]]).]의 수상 이유가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주도했거나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았고 문학상을 받은 2명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시절의 남아공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노벨상을 받았다.]되어 있는 것이나 [[앙골라 내전]] 당시 [[미국]]과 [[중국]]의 개입을 전 세계가 비난한 이유가 '타국에 대한 무단 침공'이나 '[[조나스 사빔비|대학살]]' 따위가 아니라 '남아공과의 협력' 그 자체라는 것을 보면 아파르트헤이트와 그를 행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당시 세계의 인식을 알 수 있다.[* 당시 남아공에 대한 인식은 지금의 [[북한]], [[러시아]]에 대한 인식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