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파르트헤이트 (문단 편집) == 정립 ==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는 1917년에 얀 스뮈츠(후에 총리)가 한 연설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남아프리카에서의 인종 분리라는 개념은 영국 식민지였던 19세기 말부터 존재했다. 케이프와 나탈에서 실시된 통행법(pass law)은 백인과 유색 인종의 거주 구역으로 흑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 차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호주]]와 [[누벨칼레도니]]에도 비슷한 법률이 있었다. 이러한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상황은 1년간 체류했던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간디]]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의 비폭력 저항은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전개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1910년대 들어 [[남아프리카 연방]] 정부 하에서 이를 법제화하는 한편[* 이를테면 국회의원 선거권을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백인과 혼혈인에게만 보편적인 선거권을 부여하고(여성은 1930년부터) 흑인과 아시아인들에게는 돈 많은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식이었다.] 원주민 토지법을 제정하여 흑인들에게 토지 거래권을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켰으나 영국계의 이익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치고 1922년 백인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을 강경 진압하면서 1924년 총선에서 보어인들이 주축이 된 국민당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본래 국민당은 1915년 [[http://en.wikipedia.org/wiki/J._B._M._Hertzog|제임스 배리 뮈닉 헤르초흐]]에 의해 창당되었다. 당시만 해도 임금법(1925년), 연금법(1927년)등으로 백인 노동자와 농민들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진보적'인 정책을 취했지만 백인과 타 인종 간의 [[혼혈]](컬러드)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풍기문란]]법을 제정했다. 그러다가 경제 대공황이 닥치고 나서 1933년 들어 얀 스뮈츠의 남아프리카 당과 기존 집권당인 국민당이 연립 정권을 구성했고 1934년에 연합당으로 합당되었다. 그러나 다니얼 프란수아 말란을 비롯해 국민당 내에서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한 계파가 탈당하면서 순수 국민당을 설립했다. 이후에도 흑인 유권자들은 별도의 의원에게만 투표를 할 수 있게 하는 차별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얀 스뮈츠가 다시 총리가 된 후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해 남아공 경제가 급부상하면서 백인들의 빈곤률이 급감하고 그동안 갖은 차별을 당했던 흑인들의 사회 진출도 활발해지며 인종차별에 대한 반발이 격화되었고 이에 얀 스뮈츠 정권은 인종차별 정책을 완화했으나[* 페이건 위원회(Fagan Commission)를 설치했는데 이 위원회에서 인종차별을 완화해야 한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완화 정도가 낮아서 흑인들의 불만을 샀고 아프리카너들에게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면서 헤르초흐계가 아프리카너 당으로 떨어져나갔고 보어인의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넬슨 만델라는 연합당 정부가 인도계 주민들을 차별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연합당 정부 규탄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자치령이었던 [[남아프리카 연방]][* 남아공이 영국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1961년의 일이다.]은 많은 수의 백인 남성을 북아프리카와 유럽 전선에 영국군의 일원으로 보냈는데 그들의 부재로 당시 남아공 내의 산업에 흑인, 특히 흑인 여성들이 빈 자리를 채우고 그들의 경제적 기여도가 높아져 감에 따라 권리 향상을 위한 요구도 높아져 갔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백인 병사들의 일자리와 백인 위주의 질서가 위협당한다고 느낀 당시 남아공의 백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치러진 1948년 총선거에서 국민당은 컬러드와 영국계가 많이 살던 도시 지역에서는 당시 집권당인 연합당에 밀렸지만, 반대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농촌 지방에서 압승을 거두어 득표율에서 11.5%나 밀렸음에도(49.2% VS 37.7%) 연합당을 5석 차(70석 vs 65석)로 누르면서 기어이 승리했고 아프리카너 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실시가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즉, 당시 남아공 주민의 4/5에게 [[헬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 남아공에선 영국처럼 [[소선거구제]]를 체택하고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에는 네덜란드처럼 전국 단위의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덕택에 만약 연합당 정부에서 도시 지역의 선거구를 대폭 늘리는 등 [[게리맨더링|선거구 조정]]을 했으면 인종차별이 얼마간 더 지속될 수는 있어도 인종차별 정책 폐지 시기가 몇십년 더 앞당겨졌을 거고 흑인들과 컬러드 계층이 오지로 내쫓기거나 백인과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처벌당하는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널리 알려진 아파르트헤이트 개념을 주창한 베르너 아이젤렌은 인종 분리와 백인 우위가 그때까지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 1948년에는 정치적 분할 정책으로서의 아파르트헤이트는 완전한 인종 분리에 비해 유리한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즉, 흑인과 백인이 하나의 국가의 한 국민으로 묶여 있는 한 소수 백인에 의한 지속적인 흑인 분리 및 통제는 비용이 많이 들고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에 백인 국가와 흑인 국가로 분할해 버리자는 것이다. 이 두 정책은 정치적 분할(대(大) 아파르트헤이트)과 인종 분리(소(小) 아파르트헤이트)로 구분되고 있다. 아무튼 위 과정을 통해 1948년 성립한 말란 내각은 인종간 혼인 금지법(1949), 배덕법(흑백간 [[성관계]] 금지)(1950)[* 명목상 외국이었던 [[반투스탄]]에서는 흑인 및 유색 인종 여성의 성관계가 허용되었다. 항목 참조.], 인종별 시설 분리법 제정, 통행법 강화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를 강화시켰다. 그 때문에 많은 부부들이 강제로 이혼당해 가정이 산산조각나는 일이 수두룩했고 특히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과의 성행위와 [[흑백혼혈]] 아기를 임신, 출산하는 것은 '[[나치즘|순수 백인의 피가 더럽혀진다]]'고 여겨 엄금하고 엄히 처벌했다. 흑인과 성관계했다는 이유로 백인들도 감방에 가는 일이 속출하였기 때문에 백인 내에서도 이에 대한 반발이 일었다. 특히 흑백혼혈 계층에서의 반발이 극심했으나 1953년 총선에서 국민당에게 유리하게 선거구가 짜여진 점을 이용해 연합-노동당 연합을 제압했고(94석 vs 62석)[* 연합당과 노동당은 이 선거에서 국민당의 4배나 되는 선거비를 썼고 득표율에서도 국민당을 앞섰지만(50.4% VS 49.4%) 결국 게리맨더링의 한계를 넘기지 못했다.] 후임 스트레이돔 내각은 컬러드와 아시아계 유권자를 선거에서 배제시키려는 법을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내리고 상원에서도 국민당과 아프리카너당의 의석이 과반조차 넘기지 못해 법안 통과가 불발되자 국민당 성향 판사들을 임명한 다음 상원 정수를 48석에서 89석으로 올리고 각종 편법을 동원해 국민당이 상원 의석의 77석을 차지하도록 조정한 뒤 사법부와 입법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나서 유색인의 공민권과 참정권을 [[게리맨더링|사실상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켜 주요 야당인 연합당과 노동당을 식물 정당화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었고 이 시기 이후부터 연합당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수당은 꿈도 꿀 수 없고 나탈 주 의회에서만 다수를 차지하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이로써 국민당과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견제 장치는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연합당은 국민당의 막장 짓거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거진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고 결국 지지 기반이 눈 앞에서 대거 날라가는데도 변변한 대응책 하나 못 내놓는 연합당의 무능함에 빡친 일부 당원들이 1959년에 진보당으로 분당해 나갔다.] 이런 비민주적 행보에 [[영국]]이 비난하고 나서자 국민투표를 통해 [[영연방]]에서 탈퇴하였고, [[FIFA]]와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추방당해 1957년 아프리카 네이션스 컵에 참여하려다가 쫓겨났다.[* 그래서 [[월드컵]]에선 지역 예선조차도 나가지 못하고 [[올림픽]]에도 나갈 수 없었는데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대회 직전에 남아공과 친선럭비대회를 한 [[뉴질랜드]]에 대한 제재 조치가 IOC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프리카의 26개국이 대거 [[올림픽 보이콧]]을 선언하여 첫 정치적 사유의 대규모 보이콧이라는 선례를 남겼다. 카메룬과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는 18~20일까지는 참가했고 말리와 스와질란드(현 에스와티니)는 보이콧에는 동참했지만 개막식에는 참석했으며 세네갈과 코트디부아르만 아프리카 국가들 중 유이하게 끝까지 대회에 참여하였다. 다만 [[패럴림픽]]에서는 하계 한정(첫 동계 패럴림픽은 1976년에야 열렸다.)으로 1976년 토론토 패럴림픽까지도 참여 가능했다가 1980년 아른험 패럴림픽에서야 참가를 불허당해 1992년 바르셀로나 패럴림픽에서 참가가 허용될때까지 패럴림픽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파일:Hendrik Frensch Verwoerd.webp]] 네덜란드 출신인[* 보어인이 아니고 2살 때 암스테르담에서 남아프리카로 이주했다.] [[헨드릭 페르부르트]](Hendrik Verwoerd) 박사(1901~1966)[* 아이러니하게도 [[http://beyondwalls.co.uk/who-we-are/wilhelm-verwoerd/|이 사람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만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며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직후 아내인 멜라니와 함께 진상 규명 위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때문에 [[http://www.timeslive.co.za/opinion/columnists/2013/07/11/the-verwoerd-who-crossed-the-rubicon|할아버지와 비슷한 성향이던 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한 적도 있었다.]]]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시행의 건설자로 불린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는 너무나 다른 흑인과 백인이 이웃으로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보어인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젊은 보어인들의 표를 사기 위해 선거 연령도 '''만 21세에서 18세로 낮추었으며''' 지금의 [[나미비아]]인 당시 남아프리카 '''속령이었던 [[남서아프리카]]를 하나의 주로 인정해 참정권을 주었다.''' 국민당 정권의 1950년 원주민 담당장관을 거쳐 1958년 남아프리카 연방 수상이 되었고 1961년에는 보어인의 숙원이던 영연방 왕국 이탈-공화국 수립을 주도하였다. 그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자로서 반투자치촉진법(=홈랜드 건설로 흑인 참정권을 완전히 박탈), 대학교육확장법(대학기관을 백인, 흑인, 인도인 기관으로 분리) 등의 통과를 주도하였다. 1960년에 영국계 백인 사업가 데이비드 프랫에 의한 암살 미수는 피했지만 1966년 케이프타운에 있는 의사당에서 그리스계 경비원 [[디미트리 차펜다스]]에게 칼로 찔려 암살당했다. 페르부르트의 사망 이후 서방 세계는 그에게 형식적인 애도를 표했으며[* 왜 형식적인 애도였냐면 서방 세계도 페르부르트와 남아공 정부를 싫어하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아공은 '''백인들조차 숨막혀하는''' 나라였다.] 남아공 정부는 일부 공항 및 도시의 이름에 '페르부르트'를 집어넣었다. 1994년 ANC 정권의 출범 이후 아파르트헤이트 잔재를 없애기 위해 [[기록말살형|그의 이름은 남아공 전역에서 지워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