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두희 (문단 편집) == [[백범 김구 암살 사건|김구 암살]] 관련 == 김구 암살의 배후는 [[이승만]]이나 [[미국]] [[OSS]] 또는 [[김창룡(군인)|김창룡]]이라는 설이 있다. 육군헌병사령관을 지낸 임시정부 출신 장흥 퇴역 육군 [[군사경찰|헌병]][[대령]]은 [[신성모]]가 배후라고도 주장한다. 원래는 장흥 대령이 그를 수사하려고 했으나, 김구가 임시정부 출신이고 장흥도 임시정부 출신[* 중국 육군에서 복무했었다.]이라서 수사를 못하게 되었다.[* 원래 수사할 때는 용의자나 피해자와 관계있는 사람은 제외된다.] 암살 이후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3달(!) 뒤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 1950년 6월 27일]을 받고 1950년 7월 10일 [[대한민국 육군]] 포병소위로 복직하고 9월 15일 중위로 진급하였다. 1951년 2월 15일 잔형 면제를 받고 12월 15일 [[대위]]로 진급, 그 뒤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으며 1953년 12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일설에는 [[대령]]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1953년 완전 복권되었으나,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을 당했다. 출소 뒤 동향 친구 사단장 [[이기건]] 장군의 배려로 [[http://cafe.daum.net/syngmanrhee/D9pI/1093|육군에 콩나물과 두부 납품을 시작했다.]] 1965년 양구에서 군부대에 콩나물과 두부를 납품하던 <신일 기업>이라고 있는데 현지 점검차 가보니 사무실 벽에 안두희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는 목격담이 있었다.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그 안두희가 맞으며, 거처는 서울과 양구를 오가서 주거지가 일정치 않았다고 하였다. 같은해인 1965년 곽태영에게 공격을 당해 언론에 안두희의 근황이 잠시 공개되었는데, 이 군납 사업으로 한 때 [[강원도]] 내 납세액 3위를 기록할 만큼 잘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때문에 "정의란 게 과연 있는 것이냐?"는 반응이 상당히 많았던 모양.[* 반공포로로 월남한 사단장의 [[전속부관]] S의 증언. 이때의 안두희는 양구에서 말 그대로 왕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그의 자식들이 학교에 다닐 때에는 교장이 직접 마중을 나갔을 정도. 군납공장은 이미 오래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현재 테니스장이 들어서 있어 관련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곽태영이 습격한 장소에 의거비가 세워져 있는데 2015년까지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안내판이 아주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항의를 받았는지 뒤늦게서야 복원했지만 관리 소홀은 여전해서 지금도 안내판과 의거비는 새똥으로 더럽혀지는 중이다. [[양구군청]]과 읍사무소에서 단 몇분 거리에 있는데도 그러는 걸 보면 아예 관리 의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1959년 [[일본]]에서 벌어진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을 보면 이때에도 국군 소속의 특무 기관원[* 공작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서류상으로는 전역했지만 실제로는 계속 육군 정보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되자 잠적하였다가 1961년 해당 단체의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게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다. 이후 1965년 김구를 추종하던 곽태영에게 목을 찔린 다음에 가까스로 살아나서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은거했다.[* 공교롭게도 이 해는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 [[하와이]]에서 운명했던 해이기도 하다.] 곽태영은 구명운동 및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270020920702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27&officeId=00020&pageNo=7&printNo=13596&publishType=00020|#]]과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020700329207023&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02-07&officeId=00032&pageNo=7&printNo=6249&publishType=00020|안두희가 "나를 찌른 곽씨는 의분에서 한 일이니 무죄로 해 주고 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달라"]]라고 해서 5년형만 선고받았다. 1987년 3월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발각되어 몽둥이를 맞으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1년과 1993년에 권중희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폭행당했는데 본인은 권중희가 그를 쫓아와서 구타하면서 자백을 강요하는 일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권중희는 안두희를 납치 감금한 후 안두희가 이승만이 자신의 배후였다고 자백했다는 얘기를 하였으나 안두희는 이것이 당시 권중희의 고문에 의한 것이라고 부인하였다. 그 와중에 1992년 2월 28일에 김구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하였다. 이 참배에서 그는 자신의 범행이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단독 범행이었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이후 1992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통하여 백범 암살의 배후가 전 육군 [[소장(계급)|소장]] 김창룡이었다고 증언하여 큰 화제가 되었고 4월 15일엔 김창룡뿐만 아니라 장택상 등 4인의 지시였다고 세부적 진술을 하였으나 증언의 세부 내용이 번복되거나 내용의 진위가 의심되는 부분들이 있어 논란이 되었다. 미국이라고 증언한 부분도 있었는데, 그 뒤 주한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의 항의가 들어왔다. 1994년 1월 4일에 그는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 선생 시해 진상규명 소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했지만, 끝내 암살의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이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아서 출석했을 때도 침대에 누워 있었다.[[http://www.hani.co.kr/arti/PRINT/824698.html|#]] 결국은 안두희 자신이 증언을 할 때마다 계속 말이 바뀌니까 문제며, 죽을 때까지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했다. 2001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바에 따르면, 김구 피살 3일 뒤인 1949년 6월 29일 미국 육군 제1군 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 소령은 '김구 : 암살에 관한 배후 정보'라는 비밀문서를 작성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3283846|#1]] [[http://news.donga.com/List/Society/3/03/20010904/7734035/1|#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1367|#3]] 이 문서는 안두희는 한국주재 미정보부대([[CIC]]) 정보원으로, 암살 명령을 내리면 누구든 죽이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면서 김구는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했으며, 한국에서 명망높은 정치인이었다고 기록했다. 이를 근거로 미국이 백범 암살에 간접적으로 개입한 것일 수 있다는 주장 또한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