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시성주 (문단 편집) === 초기 일생 === 안시성주의 일생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부족해서 그 정확한 출생시기와 출생지를 알 수 없다. 안시성주는 1차 여당전쟁 중 당 태종이 인용한 풍문을 통해 처음으로 역사 기록에 이름을 드러낸다. 642년,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포함한 100여명을 살해하고, 영류왕의 조카를 [[보장왕]]으로 옹립한 후 스스로 대막리지의 지위에 올랐다. [[태종(당)|당태종]]이 들은 소문에 의하면 안시성의 성주는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불복하였고, 연개소문의 공격에도 성을 지켜내어 이후로도 계속 성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안시성주가 국정을 장악한 [[연개소문]]에게 대항했는지, 그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구려-당 전쟁]]에서 [[당나라]]가 패한 것을 희석시키기 위해 고구려의 실권자인 연개소문과 그들이 대패한 안시성주가 대립했던 것을 과장했다고 보기도 하고, 연개소문 정권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부의 대립을 방증하는 사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극단적인 경우, 역사학자 서영교는 이와 더불어 [[주필산 전투]] 당시 안시성과의 연계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착안, 안시성을 독립국에 가까운 세력으로 상정하고, 연개소문 정권 사이에서의 알력을 원인으로 짐작하는 가설을 국방일보 연재물에 실은 바 있다. 물론 이에 대해 반박도 있다. 대립 자체가 존재하였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고,[* 다만 당태종이 영류왕의 복수를 명분으로 하고 전쟁을 일으킨 점을 볼때, 만약 실제로 안시성주가 쿠데타에 불복했다면 항복을 요구할 수도 있는 중요 정보였으므로 당태종의 귀까지 들어간 이런 정보가 오보였을 것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특히나 이 시점은 주필산 전투 직후였기 때문에 고연수, 고혜진을 비롯한 항복한 고구려군에게 소문을 확인해볼 수도 있었다.] 또 대립했다고 해도 안시성주와 연개소문이 곧 관계를 회복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정변 자체와 안시성 전투의 전개가 꼭 직접적으로 연관되었으리란 보장도 없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는 당시 고구려가 요동 세력과 평양 세력으로 양분되어 대립 중이었으며, [[연개소문]]은 평양 세력이었고, 안시성주는 요동 세력이라 연개소문의 반란에 반발하여 대립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