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용복 (문단 편집) == 생애 == 1693년([[숙종(조선)|숙종]] 19년) 그는 울릉도로 올라가서 다른 어민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 울릉도에 일본 어선이 불법으로 정박해 있는 모습을 보고 일본까지 가게 된다. 이때 원인이 참 대단한데, 당시 [[울릉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기 때문에 일본측에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일본 나름대로 개척을 하려 하였으며, 이미 도해 허가증까지 받아(다케시마[* 여기서의 다케시마는 울릉도를 의미한다. 당시 독도는 마쓰시마라 불렀다.] 도해허가증) 낚시를 하고 있었다. 조선은 조선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억울한 상황이었고, 일본은 일본대로 평화롭게 섬에 가서 낚시 하고 있는 본령 섬에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조선인들을 본보기로 외교항의를 하려 했던 것. 이때 다수의 [[논문]]과 [[동북아역사재단]] 웹사이트는 안용복이 납치되었를 설명할 때 흔히차 '도일' 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잘못된 용어 사용이다. 안용복은 오키 도주[* 이 당시 오키노카미는 요코스카 번의 초대 번주이자 니시오 가의 4대 당주 니시오 타다나리 였지만 정작 오키 섬이 속한 오키국은 칸에이 15년(1638년) 이후 막부의 직할지가 되었기에 막부에서 [[하타모토]]를 파견시켜 오키 도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앞에서 "울릉도는 명백한 조선의 영토이며 일본인이 불법으로 남의 땅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멋대로 고기잡이를 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자 당황한 오키 도주는 그를 상위 기관인 호키슈(백기주) 태수[* 이케다 츠나키요. 옛 오다 가 출신 무장 [[이케다 츠네오키]]의 후손이다. 돗토리 번은 석고 32만석으로 [[도자마 다이묘]] 중에서는 비교적 상위권에 속하는 편이었다.]에게 보냈고 호키슈 태수는 다시 [[에도 막부]]에 편지를 보냈다. 에도 막부는 "그런 작은 [[독도|섬]]을 무력으로 빼앗는 일은 지극히 쉬운 일이지만 그깟 섬 하나 때문에 [[조선|이웃 나라]]와의 교린을 해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울릉도에서 조업하던 가문들에게는 일본 동해안으로 어장을 옮길 것을 지시하고 다시는 일본인이 울릉도로 가지 않겠다는 편지[* 이 문서는 [[관백]](간파쿠)이 직접 작성해준 문서였다.]를 써서 안용복에게 준 다음에 그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도중에 [[대마도]]주가 수하들을 보내 [[시모노세키]]에서 안용복 일행을 잡아 그를 고문하고 쇼군이 준 편지도 빼앗았다고 하는데 물증이 사라진 셈. 그런데 대마도주[* 이 당시 대마도주(쓰시마후츄번 번주)는 소 요시츠구이다. 그런데 얼마 안가 아들 없이 요절했기에 가독은 동생인 소 요시미치를 양자로 들인 후 잇게 하였다. 안용복이 고문 받고 구금당하는 동안 대마도주가 바뀐 것이다.]는 조선 측에서 자기네 백성을 고문했다고 항의할까봐 안용복과 박어둔을 2년간 동래 왜관에 두고 약과 밥을 주어 회복시킨 다음에 조선에 표류한 어부를 구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풀어준 다음 "조선에서는 이들이 일본 땅인 [[죽도]]에 함부로 들어오는 일이 잦으니 그걸 막아달라"는 요구를 했다. 이에 조선은 일본이 주장하는 죽도([[다케시마]])가 울릉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작은 섬 때문에 싸우기 싫어 영토분쟁으로 번지기 전에 대충 마무리 짓기 위해 "우리가 어민들이 먼 바다로 못 나가게 하고 심지어 우리 땅인 울릉도도 못 가게 하는데 하물며 니네 땅인 죽도에 들어가게 하겠니?"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애매한 표현으로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하면서도 울릉도가 조선 땅임은 확실히 한 것이다. 대마도주가 보낸 사신 귤진중([[다치바나 마코토]])은 울릉도 내용을 빼달라고 옥신각신하다가 소득이 없자 열받아 조선에서 제공한 체재비도 받지 않고 돌아가버렸다. 2년간의 구금이 끝나고 풀려나온 1696년에 [[울산광역시|울산]]에서 [[순천시|순천]] [[송광사]]의 [[승려]] 뇌헌의 배를 포섭하고 11명을 모집하여[* 승려 5명 포함(뇌헌, 승담, 연습, 영률, 단책). 이는 일본의 유식층에 승려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승려들과 함께 움직인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울릉도로 출항을 나서게 되는데 이는 고기잡이 출항이 아니라 일본에 다시 항의하려고 작심하고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울릉도에 일본 어선이 아직도 여럿 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일본 어부들과 실랑이를 벌이게 되고 결국에는 [[독도]]까지 도망가는 일본 어선을 쫓아간 끝에 일본으로 가서 자신을 '울릉우산양도감세장'[* 울릉도와 자산도, 두 섬의 [[세금]]을 관장하는 [[장군]]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의 국역본에서는 '울릉자산양도감세'라고만 되어 있어 뭔가 애매한 느낌을 주지만 이것은 뒤에 붙어있는 장(將)을 '장차 ~하려 했다'는 뜻으로 [[오역]]해서 벌어진 [[해프닝]].] [[벼슬]]이라고 자칭하고 다시 호키슈 태수를 만나 항의한 후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에도 막부는 대마도주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 및 월경(越境)을 금지[* [[죽도도해금지령]].]하겠다고 통보하였다. 한편 안용복이 쫓던 일본인 어부들은 호키슈 태수에게 붙잡혀서 월경죄로 모조리 [[사형]]당한다. 이 때 안용복은 에도 막부에 대마도주가 자신을 구금하고 쇼군의 문서까지 빼앗았다고 항의했다는데 대마도주의 아비[* 쓰시마후츄번 3대 번주 소 요시자네이다.]가 아들이 죽을 것[* 위에서 언급한 소 요시츠구인데 실제로 얼마 못가 죽어 버렸다.]을 염려하여 밀사를 안용복이 있던 호키슈와 중앙 정부가 있던 [[도쿄|에도]]에 보내는 등 이 일이 공론화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다만 그렇게 호키슈로 가던 대마도주의 밀사는 도중에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돌아왔다고 한다. 안용복은 시모노세키를 거쳐 느긋하게 돌아가려 하다가 또 대마도주의 술수에 걸릴까봐 호키슈를 통해 조선의 [[강원도]]로 귀국한다. 그러자 강원 감사는 안용복을 붙잡아 뭐하다 왔는지를 캐물었고 일본에 갔다왔다고 하자 허가를 받지 않은 월경죄로 하옥 후 다시 [[의금부]]로 보냈다.[* 자유여행 [[개념]] 따위는 생소하던 시절일뿐더러 지금도 상당수 [[국가]]는 [[여권]], [[비자]]가 필요한 시대니 어찌보면 당연한 조치이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조선 조정에서는 논의가 벌어졌는데 울릉도 영유권을 확실히 하고 일본 정부에게까지 확언을 받아온 점 등은 대다수 [[관료]]들이 다 공(功)으로 삼을 만한 일로 보았다. 특히 에도 막부의 월경 단속 약속이 들어오자 [[남구만]]은 아예 이는 역사적인 쾌거라고 칭찬했고 대소 신료들이 공이 "능히 죄를 덮을만 하다"고 주장했으나 [[윤지완]]이 "하지만 그렇다고 안용복의 공무원사칭죄와 무단 월경죄를 처벌하지 않으면 흉내낼 이들이 많을테니 처벌을 아예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하여 사형은 면한 대신에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가 어디로 유배를 갔는지, 그 후의 삶은 어떠했는지, 언제 사망했는지 등은 전하지 않는다. 출신이 관직과 아무 연관이 없는 평민이었던만큼 유배 기간 중에 조용히 살다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용복 사건 이후 숙종 대에는 울릉도 인근에 대한 감찰이 강화되어 원칙적으로 3년에 1번씩은 울릉도 인근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안용복 이후 조선에서는 [[고종(대한제국)|고종]] 때까지 울릉도 인근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벌어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