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위 (문단 편집) == 생애 == [[1563년]] [[전라도]] [[김제시|김제군]] 백석면 학당리(現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학당마을)[* [[순흥 안씨]] 집성촌이다.]에서 아버지 안경신(安敬信)과 어머니 [[임(성씨)|조양 임씨]](兆陽 林氏)[* 임핍(林愊)의 딸이다.] 사이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http://gimje.grandculture.net/Contents?local=gimje&dataType=01&contents_id=GC02600835|#]]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의 5촌 조카라는 이유로 무고되어 [[평안도]] [[용천군]]에 유배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함락되자 배소를 이탈한 뒤 [[평양시|평양부]]에 도착해 어느 병사의 막하에 배속되었다. 1592년 영유무과(永柔武科)에 급제하여 군인으로 발탁되었다. [[이항복]]의 특천으로 대동찰방 겸 조방장(大同察訪兼助防將)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에는 [[거제시|거제현]]령에 제수되었으며, [[당항포 해전]]에서 적의 중선 한 척을 불태우는 전공을 세웠다. 1597년에는 부산에 침투, 방화해서 적군의 건물과 군수 물자들을 태워버리는 공을 세웠다. 그런데 이 부산 왜영 방화는 희한하게도 불똥이 튀었는데, 이걸 [[선조(조선)|선조]]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끌어내리는 핑계 중 하나로 적용된 것이다. 이때에 악연이 된 인물이 [[이원익]]. 거기에 직접적은 아니지만, 이원익과 더불어, 조정에서 이순신을 처벌을 말리는 노대신인 [[정탁]]은 정여립을 밀어주었던 경력이 있어, 다른 의미로도 악연이다. [[이순신]](李舜臣)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명량대첩]]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침시키고 대승을 거둘 때 대활약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이순신이 타고 있던 대장선을 제외하고는 12척의 배 모두 뒤로 빠져서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이후 이순신의 대장선 1척으로 일본을 상대로 분투하던 중 초요기[* [[招]][[搖]][[旗]], 대장이 휘하 장수들을 자신 곁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는 [[깃발]]. 크기나 색깔은 대장의 직품에 따라 달랐다.]를 올려 다른 함선을 부를 때 안위가 가장 먼저 이순신을 도우러 갔다. 이때 이순신이 >'''安衛、欲死軍法乎?汝欲死軍法乎?逃生何所耶?''' >-----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명량 해전]]은 패배하면 조선은 치명타를 입고 일본에게 장악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전투였다. 어차피 탈영에 성공해도 [[배설(조선)|배설]]처럼 처형당하거나 일본군한테 잡혀 죽거나 둘 중 하나지만 [[필사즉생행생즉사|죽기살기로 싸우면 이겨서 살 수도 있다.]]] >『정유일기』 9월 16일 라고 꾸짖자 서둘러 가세했다. 이때 일본군 함선 3척에 포위되어 격침될 뻔 하기도 했지만[* 안위가 1:3을 판옥선 성능빨로 찍어누르지 못했다는 점은 [[장비빨|판옥선의 성능빨]]을 살리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증거 중 하나다. 그냥 이순신이 상식 이상의 괴수인 거다...] 대장선이 달려와 3척의 왜선을 작살낸 덕에 무사히 넘어갔다. 이어서 [[노량해전]]에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러한 전공이 이순신의 장계 덕분에 널리 알려져 선조 31년(1598)에 전라우수사로 제수되었다. 1599년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600년에는 전라병사에 제수되었다. 1602년(선조 35년) 전라수사에 임명되었고, 1605년에는 충청병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06년 경상수사가 되었다가, 1608년에는 전라수사로서 수군을 통제하였다. 1619년에는 평안방어사로 임명되었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대장으로 임용하려 하였으나 반대파의 시론에 부딪혀 향리로 돌아와 조용히 지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74세 고령으로 왕의 수레를 모시고 따라가기 위해 올라가던 중 은진(恩津)에 머물고 있었으나 길이 막힌 상황이어서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침내 강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 조용히 보내다가 1644년(인조 22년) [[향년]] 8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http://gimje.grandculture.net/Contents?local=gimje&dataType=01&contents_id=GC02600835|출처]] 명량 해전 이전에는 적당히 유망한 무장에 불과했지만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첫빠따로 갈굼받는''' 기록 때문에 겁쟁이라고 폄하받기도 하는데, 사실 안위의 본래 직책은 '''육군'''이었을뿐더러 칠전량 해전 이후의 다 무너져버린 수군 상황과 명량 해전 당시의 절망적인 전력차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행동이라는 게 중론이다. 수군절도사 [[김억추]], 중군장 김응함 등 이순신을 곁에서 호위하거나 명령을 하달받아 같이 싸워야 할 임무가 있는 수군 장수들조차도 겁을 먹고 다가오지 못하는 끔찍하게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을 무릅쓰고 이순신의 부름에 가장 먼저 응한 것은 그만큼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먼 훗날 [[노먼 슈워츠코프]]가 이야기하는 용기의 정의에도 부합한다. "용기란 두려운 와중에서도 먼저 나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True courage is being afraid, and going ahead and doing your job anyhow)." 두려움을 극복하고 장수로서 의무를 다한 것이기에 더욱 의미 있는 행동인 것이다. 실제로 안위 다음으로 나선 김응함의 경우, '''안위 이상으로 더욱 호되게 꾸짖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장을 보필하는 중군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일개 현령보다도 어기적거리다 나왔으니 그럴만 했다. 이순신도 안위를 말로만 갈궜지, 제일 먼저 합류한 안위의 공을 잊지 않고 보고했다. 덕분에 종5품이었던 안위는 폭풍승진을 거듭하여 전라수사, 경상수사에 임명되고 정3품까지 올라가는 등, 성공한 군인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