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중근 (문단 편집) == 가족 == [[http://cafe.naver.com/iahn/2129|출처]] * 조부 안인수(安益壽) * 백부 태진(泰鎭) * 사촌 종근(宗根) * 조카 영생(榮生) * 사촌 장근(莊根) * 조카 봉생(鳳生) * 조카 [[안춘생|춘생]] * 중부 태현(泰鉉) * 사촌 [[안명근|명근]] * 조카 의생(毅生) * 조카 양생(陽生) * 사촌 홍근(洪根) * 아버지 태훈(泰勳)[* 동학군을 이끌다 관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김구]]를 보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를 계기로 안중근과 김구는 안면이 있었는데, 이 둘은 나이대도 비슷했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母 [[조마리아]](趙姓女)[* 안중근의 순국 뒤에 많은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임시정부에서는 그녀를 독립 운동의 정신적 지주라고 불렀다. 200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 분의 무덤은 동생 안정근과 함께 프랑스조계 징안쓰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월남묘지에 안장했는데, 이후 도시개발로 묘지터에 구광백화점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 백과 참조)][*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만국공묘는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무참히 파괴되어 푸둥공원에 외국인 묘지를 하나 더 조성해 남은 유해들을 이장했다가 다시 만국공묘로 재이장했다.([[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5081301070530114002|문화일보 기사]]) 안중근 의사는 일제 때문에 시신을 찾을 수 없고, 어머니인 조마리아는 도시 개발과 문혁 등 어수선한 상황으로 묘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한민족 후손들에게 큰 한이다.] * '''중근''', 부인 김아려(金亞麗) * 딸 현생(賢生) * 사위 황일청 * 외손녀 황은주 * 아들 문생(文生)[* 안분도(세례명인 [[베네딕토]]를 한자로 음차하면 '분도'다)로도 불린다. 안중근은 사형 직전 장남 분도를 천주교 사제로 키워달라고 부탁했으나, 장남의 돌연한 죽음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다.] * 아들 [[안준생|준생]] * 손자 웅호(雄浩) * 증손자 보영 * 손녀 선호(善浩) * 손녀 연호(蓮浩) * 누이 성녀(姓女) * 동생 정근(定根) * 조카 원생(原生) * 조카 미생(美生), 사위 김인(金仁)[* 김구의 장남] * 조카 [[https://ko.wikipedia.org/wiki/안진생|진생]](珍生) * 동생 [[안공근|공근]](恭根) * 숙부 태건(泰建) * 사촌 [[안봉근(1881)|봉근]](鳳根) * 사촌 충근(忠根) * 사촌 성근(性根) * 숙부 태민(泰敏) * 사촌 경근(敬根) * 사촌 형근(炯根) * 숙부 태순(泰純) 사실 안중근의 집안이 통째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독립 운동 때문에 일가가 [[중국]]·[[미국]]·[[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탓에 이들의 후손들 대부분이 외국에 살고 있어 안중근의 유명세에 비해 이 집안에 대한 정보는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안중근의 고명딸 안현생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2010년 3월 25일에야 '해방 후 귀국[* 주로 [[중국]]에서 살았으나 [[러시아]]로 망명했었다는 기록이 있다.]해서 1953년 ~ 1956년에 효성여자대학교(現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는 공식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일제 시대의 여성 독립 운동가」, 2014년 5월, 국가 보훈처] 이후 안중근의 장남 안문생(안분도)은 어린 시절 길에서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중독돼 일찍 죽었고 그리고 이것 때문인지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은 이후 변절,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伊藤 文吉)에게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발언을 하고, 나중에 소위 이토 가문과의 화해란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모시는 사찰에서 이토 분키치에게 공개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저질렀다.[* 2014년 [[MBC]]의 다큐멘터리 '안중근 -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는 안준생의 퍼포먼스가 일제에 의해 꾸며진 퍼포먼스였다고 주장했다. 안준생은 이토 분키치에게 영어로 "네 아버지는 잘못했고 우리 아버지는 희생되었다"고 일갈했는데 일제는 안준생이 사죄를 했다고 보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당사자들도 아니고 후대 사람들의 일방적 주장에 지나지 않으며, 당대에 기록된 사료나 문헌 상으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인척 관계였던 김구가 안준생의 발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살해해야 한다고 날뛰었을리가 만무하다.] 이 일은 친일 매체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이에 분노한 [[김구]]가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安俊生)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고 백범일지에 적혀 있다. 안중근의 아버지는 김구가 동학 접주로 활동해 일본군에 쫒길때 보호해준 적이 있고 안중근의 집안 대부분이 독립 운동에 헌신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출범 후에는 김구와 함께 활발한 활동을 폈다. 그런데 [[안공근]]은 말년에 김구와 파벌을 달리해 활동하다 1939년에 상해에서 실종되었는데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안공근의 사인은 당시 중국 경찰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안공근이 핵심으로 활동한 한인 애국단이 이봉창의 천황 폭탄 투척, 윤봉길의 상해 의거 등을 주도한데다 당시 상해에서 일제의 간첩 공작이 활발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안공근은 일제 밀정에 의해 언제 암살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본에 의한 암살설, 김구의 측근에 의한 암살설 등 여러설이 있는데 아직 확실치는 않다. 또 다른 사촌 [[안봉근(1881)|안봉근]]은 독일 베를린으로 떠나 두부 장사를 하며 번 돈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고, 같은 독일 망명자인 [[이미륵]]의 정착도 도왔으며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결승에서 금메달 및 동메달을 각각 땄던 손기정과 남승룡의 파티를 주재한 바 있다. 그러나 2020년 미국의 한국학연구가 프랭크 호프만은 저서 <베를린의 한국인, 사진 속의 한국인>을 통해 안봉근이 나치에 협력했을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나치는 식량 확충을 위해 고기 대체품을 연구하던 중 안봉근을 찍었을 지도 [[https://www.upinews.kr/newsView/upi202001100109|모른다고 했다.]] 이 의혹은 UPI 뉴스에서 단독 보도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