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중근 (문단 편집) ==== [[이승만]]의 평가 ==== 이승만은 전형적인 외교독립론자로, 개별적인 암살이나 폭탄테러 등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전년도인 1908년, 친일 외교 고문으로 한일 합방을 지지하고 홍보하는 친일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를 [[전명운]]과 [[장인환]]이 [[스티븐스 저격사건|사살했을 때]]의 미국 여론을 겪어봤던 이승만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승만은 [[윤봉길]]의 [[윤봉길#s-3|의거]]에 대해서도 비판한 바 있을 정도로 암살을 사용한 독립 운동가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성향이었다.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일본이 한국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앉혀놓은 스티븐스가 두 한국 사람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되었다. (중략) 그리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살해했다. 신문에는 한국 사람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며 무지몽매해서 그들의 가장 좋은 친우인 이토 히로부미와 스티븐스를 살해했다는 기사들이 가득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나의 교수는 나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나의 석사논문을 나에게 우송해 주고는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 >이승만이 1912년에 쓴 '청년 이승만 자서전' 중에서. 위의 미국 분위기에 대해 참고할 점은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 미국의 정계나 사회가 매우 친일적이고 [[와패니즈]]들이 상당했다는 것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등 정치인들은 일본을 아시아의 백인들처럼 대우했고 뒤의 일이지만 헨리 스팀슨처럼 일본으로 여행가거나 일본 문화에 심취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미국 사회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무지몽매한 살인마로만 본 것은 아닌데 앞서 의거를 했던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방면 되었고 장인환은 판사들이 애국심에 의거하여 본 행위라고 판단하여 형량을 10년으로 낮춰줬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를 비롯한 미국 신문들도 '스티븐스는 한국의 공공의 적'이라는 제목으로 더럼 스티븐스 저격 사건을 보도하여 한국에 대한 입장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미일관계]]에 따른 정치외교적인 부분에 더 치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8.15 광복|광복]] 후에는 그 나름대로 예우를 갖춰 1959년 05월 29일 이승만은 안중근 의사에 헌화하고 참배했다.[[http://contents.archives.go.kr/next/archive/viewArchiveDetail.do?archive_event_id=001465354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