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리아 (문단 편집) === 고대 === 고전기 그리스 학문의 중심지가 아테네라면,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학문의 중심지는 바로 알렉산드리아였다.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고 대대적으로 확장, 그 유명한 도서관을 세우고 많은 유대인들을 시가지 동부로 이주시켰다. 또한 그는 그리스의 죽음의 신 하데스를 이집트에 토착화시켜 세라피스란 이름으로 받아들였는데,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이 공통으로 숭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기를 기점으로 이집트와 유리되기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주민들은 그리스인들이 다수를 차지했고, 스스로 이집트인이 아닌 그리스인임을 표방하고 다녔다. 이집트 외부에서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이집트 옆의 알렉산드리아'로 이집트와 알렉산드리아는 구분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를 비롯한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인을 경멸하였으며 그리스와 이집트의 융합은 늘 이집트의 복종을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알렉산드리아의 이집트인들은 점차 배제되기 시작하였고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의 문화를 유지하고 이집트의 문화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래도 알렉산드리아의 이집트인들은 철저히 노예와 같이 수탈당한 알렉산드리아 밖의 이집트인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다음대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부터 알렉산드리아는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또한 무세이온 (연구소)과 그 부속 도서관, 천문대, 해부학 연구소, 동물원 등을 세웠다. 그 중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도 들어가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큰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무제이온이라는 전문 연구기관에 소속된 도서관이었다.]이었다. 대도서관은 장서가 무려 70만 권에 이르는, 당시로선 세계에서 책(두루마리)가 가장 많은 시설이었다. 또한 약 2200년 전, [[에라토스테네스]]가 최초로 지구의 둘레를 추산하는데 이용한 두 도시 중 하나이다. 하짓날 정오에 [[시에네]]에서는 태양이 정확히 머리 위(천정)에 위치하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천정에서 7도만큼 아래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 그는 사람을 시켜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 사이의 거리를 알아낸 뒤, 이를 이용해 지구의 자오선 길이를 역산하여 25만 스타디아(약 46,250 km)라고 결론을 지었다. 실제 지구의 자오선 길이인 약 40,009 km에 비해선 오차가 좀 있는데,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가 동일한 경도에 있지 않고, 지구가 완전한 구형이 아니며, 인간의 걸음 수에 의존하여 부정확하 측정했던 탓이다. 그러나 이를 감안해도 추산한 시기가 기원전임을 감안하면 놀랍도록 정확한 결과이다. 이렇듯 당대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대도시였으나, 그 장대한 도서관은 애석하게도 후대에 모두 불타고 파괴되어 거의 대부분의 장서는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이 파괴의 원인에 대해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략 때 로마군이 이 도시에 진주하면서 도서관과 박물관을 불살라버렸다는 설, [[아우렐리아누스]]의 침략으로 불탔다는 설, [[콥트 정교회]] 주교가 원인이라는 설, 무슬림의 침략[* 18세기 유럽에서는 이 설이 정설로 여겨졌으나 [[에드워드 기번]]이나 [[볼테르]]가 확실한 증거도 없으면서 다른 종교 탓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리 따지자면 그리스도교 근본주의도 용의자라고 깠다. 실제로 같은 그리스도교끼리도 분파가 다르다고 서로 죽고 죽인 역사가 너무나 장대하며, 극렬 근본주의자들이 이집트를 비롯한 타 국가의 고대 유적에 대하여 테러나 방화를 가했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이라는 설 등등이 있다. 물론 각각의 설 중 무엇이 맞는지, 특히 완전한 파괴를 야기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도 없고 학계의 정설도 없다 보니 진범은 아직도 불명. 학계에서도 도서관은 한 번에 파괴된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르며 서서히 허물어졌고, 위의 사건들은 그런 과정의 일부였다고 본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기리는 의미의 새로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2002년에 (이집트의 재정 문제로) [[UNESCO]]가 개관했다. 알렉산드리아 동쪽 해안의 샤트비(El Shatby) 거리에 있으며, 현존 장서는 대략 100만 권 수준이다.[* 건물을 짓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부터 50만 권을 기증받은 뒤에야 체면치레를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장서가 1400만 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초라한 숫자다. 물론 이렇게 된덧이 이집트 국가대표도서관의 자리를 차지하는게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국가도서관이고 주요 공문서 및 역사자료는 이집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맡고있기때문에 재건시기가 늦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위상이 상당히 떨어지기때문이기도 하다.] 그외에 알렉산드리아는 무역과 유리공업이 발달하며 지중해권 최대급 도시로 번영하였다. [[로마 제국]]이 이집트를 지배하면서 알렉산드리아는 수도 로마의 뒤를 이은 제국 제2의 도시이자 이집트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스계인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알렉산드리아 시민권이라는 로마 시민권과 유사한 권리를 보장받았고 그들은 자신들이 로마시민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일대의 그리스도교 중심지기도 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서기 69년 성 마르코가 그리스도교를 알렉산드리아에 전파했고,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성 마르코의 뒤를 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권의 중심도시로서 로마 등과 함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인정받았다. 이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5대 총대주교좌에 속한다. 하지만 3-4세기 들어 도시는 쇠퇴하였고 365년 7월 21일 해일이 일어나 수천 명이 사망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