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리아 (문단 편집) === 중세 === 이후 [[동로마 제국]]이 계속 지배했는데 [[기독교]]도와 [[이교도]] (다신교도와 유대교도)간의 싸움으로 계속 쇠락해갔고, 619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집트에 침입해 10년간 지배하기도 했다. 629년 동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탈환했지만 [[이슬람 제국]]의 등장으로 아랍인이 차지했고, 이집트의 정치 중심이 현 카이로 인근 푸스타트로 옮겨가면서 행정중심지 기능은 잃고 항구도시로 남았다. 641년 아랍군대가 이곳을 점령했을 때 당시 사령관 [[아므르 이븐 알 아스]]에 의하면 궁전 4천 채, 목욕탕 4천 곳, 기름상점 1만 2천 곳, 정원사 1만 2천 명, 유대인 4만 명, 극장 4백 곳이 있었다. 구체적 수치의 정확성은 차치하고 대단히 번영한 도시였음은 분명하다. 664년 아므르가 사망한 후 이집트 총독으로 부임한 우트바 이븐 아비 수피안 ([[무아위야 1세]]의 동생)은 이곳에 총독궁 (다르 알 이마라)을 세우고 1만 2천의 아랍 군대를 배치하는 등 아랍화를 시도했으나 이듬해 사망하기도 하였다. [[파일:Fort_Qaitbey_-_Alexandria_-_panoramio.jpg|width=600]] [[파로스의 등대]] 터에 지어진 카이트베이 요새 7세기에 [[동로마 제국]]과 [[정통 칼리파]] / [[우마이야 왕조]], 12세기에 [[예루살렘 왕국]]과 [[파티마 왕조]] / [[장기 왕조]] 간의 공방전이 벌어진 도시이다. 12세기의 전쟁은 결국 [[살라흐 앗 딘]]의 승리였다. 이후 [[맘루크 왕조]] 시대에는 기존에 허물어진 파로스 등대의 잔해를 수습하여 해안 요새를 지었다. 그러나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인도항로가 개척되고 알렉산드리아의 중요성은 떨어지고 한동안 쇠퇴했다가 [[무하마드 알리]]가 알렉산드리아와 나일강을 연결하는 마흐무디야 운하를 개설하는 등 도시 개조를 통해 확고한 이집트 제2의 도시로 자리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