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카에다 (문단 편집) === 배경 === 왜 이슬람 원리주의가 이토록 폭력적인 집단으로 변질되었냐라는 원인을 찾으면, 그 시작은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세속적 성향의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은 끝에 전쟁을 치르면서 생긴 변화로 꼽고 있다. 실제로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는 원수지간으로 [[제2차 세계대전|2차 대전]] 이후 수십 년간 서로 충돌해 왔다. 이 시기는 2차 대전 이후 영국,프랑스등이 분점했던 식민지였지만 이들의 힘이 약해지자 독립을 시도했는데, 이때 독립하면서 민족주의 정권이 들어선 아랍 지역의 모든 공화국들은 한결같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철저히 탄압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동의 맹주라는 [[이집트]]의 사례를 보면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의 쿠데타 이후 집권한 군부독재 정권은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시리아]], [[리비아]] 등과 아랍연합국가 건설을 추진하였고[* 1958년 시리아와 이집트는 '''통일아랍공화국'''이라는 국가연합을 형성하였으나, 1961년 시리아가 이탈하면서 무너졌다. 리비아, [[수단 공화국|수단]] 등과는 논의 단계에서 무산되었다.], [[샤리아]] 신정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수십 년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문제는 이들이 이슬람주의를 내세운 왕정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난동을 부렸던 것. 서로 지향점이 아예 다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가장 큰 위협 대상으로 보고 있다. 이는, 냉전이라는 당시 시대의 거대한 흐름때문에 당시 석유와 일부 자원 외에 아무것도 없는 중동의 국가들이 독자적 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에도 아랍에서 이권을 가진 자들은 석유와 관련된 집단이고, 이들은 일찍이 이슬람 종교집단과 영합해 정치와 종교의 혼재형태로 아랍 민중을 지배해왔고, 비록 식민지긴 했지만 서구의 정치,종교 분리 체제를 경험했다. 따라서 독립후 기존 기득권은 당연히 이슬람을 내세울 수 밖에 없었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 나아가 무신론에 가까운 공산주의 체제를 주목했다. 그렇게 가말 압델 나세르등 아랍의 민족주의 공화국들은 초기 공산주의식 군사독재를 통해 기존 이슬람에 영합한 기득권을 탄압해 그들의 힘을 빼려 했고, 그들이 저항하면서 내세운게 오히려 이슬람주의인 것이다. 사실 왕정은 나세르에 대항해 이슬람주의를 내세우긴 했지만, 그곳은 석유가 나는 지역이고 석유 패권을 지배하기 위해 미국과 손을 잡고 미국 중심으로 한 서방에 안정적으로 석유를 공급하는 대신 왕정의 안보를 책임져주고 석유 수익을 독점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서로 동맹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라크나 이란등 산유국임에도 정세가 불안했던 나라는 그 석유를 국유화하려는 민족주의 세력이 결국 공산주의 소련과 무관하지 않기에 미국이 억지로 개입해 무너뜨렸던 것. 그런데 이것이 정작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는 왕정이 돈맛을 보더니 이교도와 손잡고 타락해 자기들만 부를 독점한채 허울뿐인 이슬람주의를 내세운다는 불만을 가졌고, 이란이 결국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지자 이제 다른 왕정도 무너뜨리고 미국도 쫓아내고 이슬람 원리주의로 가자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각 산유국 왕정이 위기를 느끼고 이들을 탄압할 수 밖에 없었고 원리주의자들의 저항도 거세졌다. [youtube(fktEkUfd6Z0)] 그 갈등에 정점을 찍은 사건이 바로 1979년 11월 20일 이슬람 제1의 성지인 [[메카]] 그랜드 모스크를 일단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무장점거해 농성을 벌이던 것을 사우디 군이 유혈 진압한 사태. [[https://slownews.kr/74671|###]]. 이슬람중에서도 가장 극단주의 꼴통 집단인 와하비즘을 내세우면서도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슬람 세계에서 그나마 큰형님 대접을 받는 이유란건 단순히 사우디가 돈 많고 힘이 세서가 아니라[* 오히려 제국주의 시대 사우드 가문은 하심 가문이나 다른 대가문에 비해 싸움 못하는 걸로 유명했다(...).]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수호자 역할을 하면서 모든 무슬림들의 종교활동을 후원하고 그들을 먹여살리는데 지출을 아끼지 않은 물주 역할을 했기 때문인데, 이슬람 제1의 성지에서 성지의 수호자라 자칭하는 사우디 왕가가 같은 무슬림을 총으로 쏴 죽이는 사태를 목도했으니 무슬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오사마 빈 라덴이 극단주의에 빠진 결정타가 이 사건이기도 했으니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다.''' 과거 나세르가 하던 짓을 알라의 이름을 댄 사우드 왕가가 했다니 참을 수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는 단 1명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왕정의 탄압에 [[무슬림 형제단]]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1981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으로 응답하는 막장 상황이 더 펼쳐졌다.[* 사다트의 후임자가 당시 부통령이였던 [[호스니 무바라크]]이다. 무바라크도 통치 내내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대한 탄압 정책을 고수하였다.] [[이라크]]를 통치하고 있던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 정권이나,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도 마찬가지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큰 갈등을 빚었다. [[9.11 테러]] 이후 [[조지 워커 부시|부시]] 정권이 테러의 배후로 이런 아랍의 독재 국가들을 지목한 것은 국제 정세에 무지한 대다수 미국인들을 상대로 무책임한 언플, 선동을 한 것이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고, 그 다음엔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며 중동은 혼란에 빠지고, 당장에 없애야할 주적이 생긴 원리주의자들은 소련을 물리치기 위해 아프간으로 모여 무자헤딘을 결성했고 이를 미국이 지원하는 아사리판이 펼쳐진 상황. 이때만해도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 극단주의에 자극을 받았지만 일단은 영어를 할 줄 알고 사우디 명문 가 출신이라는 점으로 인해 미국에 간택되어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오사마 빈 라덴]]의 분노 여부를 떠나 이때의 충격으로 안보위기에 휩싸인 메카, 메디나를 포함한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이 상시 주둔하게 된 것은 많은 [[무슬림]]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가져왔다. 이는 마침 전쟁이 끝나가면서 투쟁 방향을 상실한 [[아프가니스탄]] 참전 무슬림들에게 새로운 투쟁 방향을 제시하는 효과를 일으켰다. 거기다, 1년 뒤 소련의 해체는 냉전시대 체제경쟁의 산물중 하나였던 국제 테러리즘의 돈줄이 하나 끊겼다는 걸 의미한다. 이로 인해 세계 각지에서 생계형 테러를 일삼던 국제 테러 조직원들이 새로운 밥줄을 찾기 위해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로 모여들었고 이 시기에 빠르게 조직을 키울 수 있었다. 오갈 데 없던 무자헤딘들이 반미성전이란 기치하에 알 카에다를 중심으로 결집해 새로운 일자리를 찾은 것이다. 문제는 10년 동안 총과 폭탄으로 전장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게 결국 또다른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알 카에다는 새로운 전쟁터를 찾기 시작했고 그것이 국제 테러리즘과 영합해 중동 전역으로 확장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