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카에다 (문단 편집) === 탄생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은 돌풍작전(Operation Cyclone)이라는 이름으로 [[ISI|파키스탄 정보부]](ISI)[* Directorate for Inter-Services Intelligence]를 통해서 [[소련]]에 저항하는 아프간 내 [[무자헤딘]]에게 자금과 무기지원을 하고 있었다. 이슬람 국가들도 이에 동참하였는데, [[사우디아라비아]]는 매년 600만 달러를 지원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특히 [[무슬림 형제단]] 단원이었던 압둘라 아잠(Abdullah Azzam)과 그의 제자 [[오사마 빈 라덴]]이 창설한 마크탑 알-키타맛(Maktab al-Khidamat,MAK)은 [[사우디아라비아]]와 ISI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막대한 자금(당시 기준으로 1년에 최대 6억 달러까지 동원 가능했다)을 이용해 무기를 공급하고 해외에서 오는 무자헤딘 대원들을 훈련시켰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이 배후에서 지원을 하고, ISI가 이를 현장에서 지휘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자헤딘 알선책 역할을 담당했다. 즉,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랍 국가에 득시글한 실업자들을 막대한 돈으로 고용해 아프가니스탄에 무자헤딘으로 보내고,''' ISI는 미국에서 오는 지원의 분배 및 이슬람 국가에서 고용된 실업자들을 무자헤딘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파키스탄 대사관에서는 하루에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비자를 내주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은 하루에만 비자를 수백 명씩 받아갈 정도로 극도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도 아닐 뿐더러, 하루에 비자 수백 개를 발급한다는 것은 실상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마구 비자를 '퍼주었다는' 의미다. 즉 이들의 탄생에는 '''[[미국]]'''과 두 이슬람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 전쟁 이후, MAK는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하여 많은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들을 끌어들었으며 미국으로부터 수백만 달러씩 지원받던 이슬람 무장 단체인 '헤즈비 알 이슬라미(Hezb-e Islami)'가 1990년대 초부터 빈 라덴과 손을 잡기 시작하면서 세력은 급속도로 커졌다. 압둘라 아잠은 MAK가 본격적인 이슬람 무장 단체로 발돋움하길 원했고, 빈 라덴은 배후에서 무장 단체들의 자금줄을 맡는 네트워크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원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두 사람의 근본적인 목적이 달랐기 때문인데, 아잠은 MAK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아프간을 지배하고 재건하길 원했으나, 빈 라덴은 MAK의 기존 역할을 유지하며 중동 이슬람 혁명을 확대하는 것을 원했다. 이 차이로 말미암아 스승과 제자 사이는 멀어졌으며, 1988년 중반 이후 갈등은 극에 이르렀는데, 이에 빈 라덴은 우선 자기 세력을 가지고 알 카에다를 창설한다. 1989년 압둘라 아잠이 암살된 이후 MAK는 알 카에다에 흡수된다. 1988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된 해외 [[무자헤딘]]들은 투쟁 방향을 상실하고 혼란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주적 소련이 물러난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누구를 위해 누구와 싸울지 목표가 없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참전한 [[무슬림]]들은 주로 [[이집트]], [[알제리]],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 출신이었는데, 이들 국가에서는 이들 무자헤딘들이 돌아오면 감시, 체포, 감금을 일삼고 있었다.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이 강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대규모 게릴라전 경험을 쌓고 온 무자헤딘들을 각 나라의 독재 정권들이 껄끄러워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다수 아랍 국가들이 정권의 무능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침체되면서 실업자가 넘쳐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자헤딘 입장에선 본국에 돌아간다고 해서 뭔가 뾰족한 상황도 아니었다. 즉 전쟁을 경험한 엄청난 숫자의 전사들이 오갈 데 없는 국제 미아로 전락하면서 그야말로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폭탄이 된 것이다.[* 이들은 중동권 외의 다른 이슬람권 분쟁 지역을 찾아서 일종의 군사 [[고문관]]이나 용병 같은 일을 하기도 했다. 이들중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 극단주의를 선택했던 [[오마르 알바시르]]의 [[수단 공화국]]으로 향했고, 수단 외에도 이런 무자헤딘의 사례로 [[나고르노카라바흐]], [[보스니아]], [[타지키스탄]] 등을 떠돌다가 마지막 전장인 [[체첸 사태]]에서 "체첸의 사자" 로 불리며 악명을 떨친 이븐 알 하타브가 있다.] 문제는 아랍 국가 안에서 아랍 민족주의와의 대결로 터질 폭탄이 미국의 판단 미스로 모두 미국을 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 미스가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이었다. [[미국]]과 긴밀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는 알 카에다가 언제부터 반미,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전환기는 아프간 전쟁이 끝난뒤 본국 사우디로 돌아가지 못하고 수단에 숨어든 이후부터이며 완전히 돌아 선 건 [[걸프전]] 이후라고 보고 있다. 이전부터 미국은 이란 이라크 전쟁때문에 지속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을 주둔하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이슬람의 두 성지 [[메카]], [[메디나]]의 수호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다른나라 군대가 자국 영토에 주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걸프전|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자국 방위에 불안감을 느낀 사우디아라비아는 결국 이라크로부터 자국을 지키기 위해 미군 주둔을 허용했다. 사실 걸프전 때까지만 해도 미군 주둔은 [[쿠웨이트]] 회복을 위한 일시적인 조치로 여겨졌지만, 걸프전 종료 이후에도 사우디 왕가와 미국 간의 합의에 의해서 미군 주둔이 계속된다. 처음에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략하자 한참 수단에서 이슬람주의 테러활동을 했던 빈 라덴은 사우디를 지키겠다며 국왕에게 알 카에다의 참전 허락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결국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진군하자 빈 라덴이 격노해 반미주의 노선을 확립함과 동시에 테러단체로서의 변환도 꾀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