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암살(영화) (문단 편집) === 옥에 티 === * 초반에 내걸린 [[관동군]] [[욱일기]]가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War_flag_of_the_Imperial_Japanese_Army.svg#mw-jump-to-license|육군]]이 아니라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Naval_ensign_of_the_Empire_of_Japan.svg|중앙 원이 왼편으로 약간 치우친 해군용 욱일기]]다. * 초반에 '일본의 육해공군'이라는 한글 자막이 나오는데 실제 일본군은 공군이 없었고 육군과 해군 내에 각각 항공대가 있었다. 그래서 1941년 [[태평양 전쟁]]이 터진 이후 [[대본영발표]]가 흘러나올 때 주로 '육해군부(陸海軍部)'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 헌병 사병들이 단화를 신고 각반을 찬 복장인데, 실제 일본 육군에서 헌병은 승마 병과로 분류되어 기병처럼 가죽 장화를 지급받았다. * 작중 이정재가 [[쿼츠]] 회중시계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쿼츠 무브먼트는 1970년대에 들어서야 개발되었다. 쿼츠와 기계식은 초침의 움직임이 다르다. * 극중 이완용이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하지만 실제 이완용은 정작 일본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 항상 통역에 의존해야만 했다. 다만 영어는 아주 유창해서 일본 관료와는 대체로 영어로 대화했다고 한다. * 안옥윤, 속사포, 황덕삼이 사진을 찍을 때 벽에 걸린 태극기는 광복 이후의 태극기다. * 염석진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고 나오는 장면에서, 뒤에 있는 법원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건물이다. 이 건물은 처음 지어질 때부터 조선인에게 위압감을 줘야 한다는 이유로 평지에 지어지지 않았다. 자동차와 부하 경찰들이 기다리는 장면은 평지로 나온다. * 실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세이난 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인해 평생 오른팔을 못 썼다. 따라서, 영화에서 오른팔을 그나마 멀쩡하게 사용하는 것 같아 보이는 장면은 고증 오류다. * 등장인물들의 일본어와 중국어: 고증 오류보다는 배우의 발음의 문제로 인한 영화적 허용으로 봐야하는 부분.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신분을 일본인으로 속이기 위해 일본인과 일본어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다수 나오는데, 이는 일본어를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일본 현지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발음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등장인물 중 대부분이 일본어 특유의 음운인 'つ'의 발음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이 조선인을 가려낼 때 이 발음을 이용했다.[* 사실 일본 애니나 드라마 등 일본 현지 매체를 많이 접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국인과 일본인의 발음이 다른 것은 비단 'つ' 만이 아니다. く, ち, と, ふ 와 같이 흔히들 한국어 음운으로 대체 가능하다고 하는 음운들도 충분히 한국인과 일본인 간의 발음 차이가 뚜렷한 편이다. 거기다, 장음이나 악센트 단계까지도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엄밀히 따졌을 때 일본 장교들이나 순사들이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 고증에 맞다. 그런데 영화 하나 찍자고 모든 배우들에 발음 교정을 시킬 수도 없는 것이니 영화적 허용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즉, 하와이 피스톨이 자신의 신분을 일본 해군 장교로 속여서 일본 육군 장교와 친분을 쌓는다던지 하는 상황은 조금 억지스럽다. 물론 설정상 일본인으로 나오는 배우들의 일본어 발음도 영 좋지 않다.[* 일본에서도 일본인으로 나오는 배우들의 발음이 하정우보다 더 안 좋다는 것을 지적하는 반응이 대부분일 정도다. 특히 카와구치 마모루의 아들 카와구치 슌스케는 영화적 허용임을 감안해도 너무 티가 나게 발음 차이가 난다.] 오히려 일본인 배역 엑스트라들의 발음이 주연 배우들보다는 나은 편이다. 하지만 이는 일본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한국 영화의 보편적 현상. [[명량]]이 좋은 예시. 중국어 또한 그다지 좋은 발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특히 [[안시성(영화)]]에서도 당 태종 역할을 맡은 [[박성웅]]의 중국어가 어색하며 못한다고 지적을 많이 받았다.], 작중에서 중국인인 척 하는 부분은 속는 대상이 중국인이 아닌 프랑스인들이었으므로 감안이 가능한 부분이다. 그나마 한국 배우들이 전반적으로 중국어 실력이 좋아서인지 전체적으로 영화 내의 중국어 퀄리티가 일본어보다는 좋다. 배우의 연기를 제외하고 영화의 제반 사항만으로 따져본다면, 옹알이도 하기 전부터 만주에 나가 살았던 안옥윤이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거나 친일파 부모 밑에서 태어나 일본식 고등교육을 받았을 하와이 피스톨이 일본어를 본토인 수준으로 잘 구사하는건 크게 고증 오류라고 보기 힘들다. 이쪽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한일합방 이후 태어났을 안옥윤, 미츠코, 하와이 피스톨이 일본어나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 보다는 [[한본어#s-3|일본어나 중국어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 한국어를 구사하는 점이 오히려 고증 오류가 된다. * 경성역 역명판의 로마자: 경성의 일본식 표기는 京城, けいぜう인데[* 왜 けいじょう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역사적 가나 표기법]] 참조. 다만 읽는 건 똑같이 케이죠라고 읽었다.], 이를 실제 일본의 역명판에서 채택하는 [[헵번식 로마자 표기법]]으로 표기하면 keijō이다. 극 중에서의 표기는 keizyo. 이 표기는 [[훈령식 로마자 표기법]]과 비슷하지만 살짝 다르다. 훈령식으로 표기하면 keizyô. * 훈장 오류: 카와구치 마모루가 고위 군인들이 수여받는 금치 훈장과 욱일동화대수장을 차고 다니는 것과 달리, 카와구치의 부관이 오히려 일본 최고의 훈장인 대훈위국화대수장을 달고 있다. 이 훈장은 일본에서도 최고위급 인사들이 수여받는 훈장이었기에 살펴보지도 않고 이를 일개 사령관 부관에게 단 건 고증 오류. * 하와이 피스톨은 작중에서 해군 소위 행세를 하는데, 경성 시내에서의 검문 장면 중 자신에게 줄서라고 소리치던 헌병 병사의 뺨을 때리고 지나가려 하자 무슨 일이냐며 그를 막아선 장교에게 정모를 고쳐 씌워 주고 어깨를 툭 치며 '수고해'라고 하는 등 마치 자신보다 한참 하급자를 대하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이 장교의 계급장을 보면 육군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다. 즉, 자신보다 상급자인 장교를 자신보다 한참 아랫사람인 마냥 대한 것. 실제 일본군은 계급에 따른 위계질서가 매우 철저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현실성이 떨어지는 장면이다. * 작중 카와구치 슌스케가 하와이 피스톨 일행과 대화 중에 조선인 소녀와 부딪히자 소녀를 권총으로 쏴죽이는 장면이 있는데 [[3.1 운동]] 때라면 모를까 1930년대에 일본 내지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던 [[경성부]] 한복판에서 보병 대위가 멋대로 민간인을 즉결 총살하는 장면은 말이 안 된다. 단순히 모욕이나 폭행을 가한 뒤 엉뚱한 누명을 씌워서 경찰에 넘겨버리는 정도라면 모를까, 아무리 일본군이라 해도 이러면 직권남용에 살인죄로 처벌을 받았다. 그 악명높은 [[난징 대학살]] 때조차 일본 민간인들이 관광을 오자 좋은 군인 코스프레를 했을 정도로 일본 시민들의 시선에 대해서는 신경썼다. 그리고 [[관동대학살]] 때 일본인 공산주의자들을 불법 학살한 일본 육군 헌병들도 비록 형식적이긴 하지만 재판을 받고 군복을 벗긴 했다. 다만 소녀를 총살한 이후 뒤에 있던 헌병들도 매우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 조선주둔군 사령관 아버지를 뒷배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카와구치 슌스케의 인격에 문제가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인[* 이렇게 본다면 이 씬은 "일본군 장교가 민간인을 제멋대로 쏴죽이는" 것이 포인트가 아니라 "권력자의 아들이 아버지만 믿고 막무가내로 미친 짓을 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재벌가 자식이 자기 권력 믿고 사람을 불러다 두들겨패는 것은 당연히 불법이지만, 영화 베테랑에서도 묘사됐고 현실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듯 하다.[* 또한 이와 별개로 타인과 대화 중인 상황에서 중간에 상대에게 그런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심각한 결례다.] * 작중 김원봉이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과정에서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에서 승리한 이후 그 보복으로 [[간도 참변|일본군들은 만주에 있는 조선인을 남녀노소 민간인 가릴 것 없이 다 죽였다.]]'고 언급하는데 간도 참변은 1920년 10월 9일에 발생했고, [[청산리 대첩]]은 같은 해 10월 21일에 터졌으니 청산리 대첩 이후 간도 참변이 발생했다는 것은 고증 오류다. 실제로는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독립군을 공격하고 만주로 일본군을 진출시키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훈춘 사건을 조작했고, 이를 계기로 만주에 일본군을 진출시켰으나 이미 독립군들이 안전지역으로 이동한 이후여서 독립군을 잡지 못하자, 홧김에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이 간도 참변이다. 즉, 간도 참변과 청산리 대첩은 동시기에 발생한 것이며, 간도 참변의 원인은 일본이 조작한 훈춘 사건과 일본군의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패배다.[* 가끔 만주의 조선인들을 죽였다는 대사를 보고 [[만주 사변]]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만주 사변은 일본군이 불법으로 만주를 공격하여 점령, 만주국을 수립한 사건을 말한다. 만주 사변은 조선인 학살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생각하면 하와이 피스톨과 카와구치 슌스케의 친분이 이상하다는 지적도 있다. 우선 이 자체가 아예 말이 안 되진 않는 게, 육해군 조직이 서로 대립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군도 사람이므로 개개인간끼리는 충분히 친분을 쌓을 수 있기는 하다. [[아키야마 요시후루]] 같이 형제여서 그런 경우도 있고, [[치치지마 식인 사건]]의 주범 [[다치바나 요시오]]와 모리 구니조는 육해군임에도 서로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다. [[5.15 사건]] 당시에는 육해군이 연대를 하려고 했던 적도 있다. 다만 아무리 봐도 억지스러운 것은 카와구치 슌스케가 고작 며칠 전에 만나 얘기를 잠깐 나눴을 뿐 별로 친하지도 않은 다나카(하와이 피스톨)에게, 그것도 '극비 임무'를 수행하는 대립 관계의 해군 장교를 자칭한지라 신상명세를 제대로 알아낼 방법이 사실상 전무한 사람에게 결혼식 특별 경호를 맡겼다는 점이다. 암살자가 자기 아버지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결혼식 경호를 맡긴다? 물론 "무서우니까 믿을만한 동료 군인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엔 둘이 보낸 시간이 너무 짧고[* 중국에서 한반도까지 당시 열차로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초면에 합석한 사람과 적당히 친해지기엔 좋은 시간이지만 이 정도 신뢰를 쌓기엔 모자란 감이 있다.], 카와구치 슌스케가 무슨 특별한 도움을 받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인간이 일본 육군 내에서도 유달리 비정상적으로 폭력성이 강하다는 점이 작중에 간접적으로 또 언급되는데, 바로 자기와 친한 해군 장교(하와이 피스톨)를 검문했다는 이유로 헌병 사병들을 구타하는 부분이다. 하와이 피스톨이 신분증이 없어 곤란해지자, 이를 타파하기 위해 자신에게 반말로 신분증을 요구하던 헌병의 싸대기를 갈겨 높은 신분의 일본인인 척 하는 모험을 시도했다. 하지만 헌병 입장에선 아무리 그래도 헌병의 정상적인 업무인 검문을 수행하는 중인데 이에 불응한 것이라 오히려 헌병 쪽이 더 험악하게 나갈 수도 있다. 이 당시 일본 육군 헌병은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높은 사람 앞에선 찍소리도 못하고 넘어가야 할 수도 있긴 한데, 그렇다곤 해도 나무라는 정도도 아니라 만인이 보는 앞에서 구타한다는 것은 그 당시 일본에서도 또라이 소리 듣기 딱 좋은 행동이다. 차라리 헌병이 아니라 순사였다면 당시 일본군과 경찰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어느 정도 있을 법한 상황일 수는 있었을 것이다. 즉, 이런 성향을 생각해보면 '원래 폭력성 때문에 육군 내에서도 왕따에 가까운 상태여서 결혼식 경호를 맡길 사람이 마땅히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해군 장교인 하와이 피스톨을 보고 한 눈에 마음에 들어 경호를 맡긴 것' 정도로 생각할 수는 있다. * 육군 대위 카와구치 슌스케가 해군 소위 다나카(하와이 피스톨)에게 "조선인 몇 명 죽였냐"는 질문을 하는 장면에도 의문점이 생기게 된다. 질문의 목적은 결국 카와구치 자신이 조선인 300명을 죽였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었다지만, 질문받는 대상자가 육군이면 몰라도 조선인(독립군)을 거의 만날 일이 없고, 무고한 조선인을 죽일 이유도 없는[* 본격적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이후라면 혹시 몰라도, 작중 시점인 1933년에는 일본 해군이 '공식적'으로는 [[간도 참변]]처럼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 학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례가 없다.] 해군이라는 점에서 어색한 부분이 있다. 오히려 일본해군 육전대는 상해에서의 각종 똘끼와 난동 등으로 유명해서, 작중 시점인 1933년이면 1932년 1차 상하이 사건의 주역으로 상해의 도살자란 별명으로도 불렸고, 카와구치도 '상해에서 온다면 육전대인가?' 하고 물어보는 이유도 상해에서의 해군 육전대가 벌린 일련의 똘끼 넘치는 행동들(상하이 사변, 홍차오 공항 사건 등)이 워낙 유명해서 여기까지는 아주 자연스러운 문답이다. 문제가 된 부분의 경우, 군인으로서 사람을 얼마나 죽였는지(중국인)' 물어보는 정도로 표현했다면 덜 어색했을 부분. * 극 중 일본 측 인물들이 조선인들의 이름을 부를 때 한국식 독음을 [[가타카나]]로 변형한 발음으로 부르는데, 실제로는 일본식 한자 독음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와 동메달리스트 [[손기정]]과 [[남승룡]]은 한자 이름의 일본식 한자 독음인 “손키테이”와 “난쇼류”라고 불렸다. * 일본의 육해군 장교는 기차 탑승시 2등석 이상 탑승이 원칙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검문하던 헌병부터가 육전대 위관이 3등석에 탑승한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을텐데 2등석도 아닌 귀빈석으로 안내한다. * 연호 표기: 이정재를 특무대 반장으로 임명하며 '''소화 8년'''이라고 연호가 뜨는데, 작중 일본인 이름은 자막에 나오던 대사를 일본식으로 읽었으므로 한자 음독인 소화보다는 '''[[히로히토|쇼와]] 8년'''으로 띄우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틀린 표기는 아니지만 일관성이 약간 떨어지는 부분. * 총기 고증: [[톰슨 기관단총]]은 M1928 모델이라면 작중 연도를 보면 등장 가능한 무기이긴 하나 상당히 무리인게 당시 독립군 세력이 구하기는 굉장히 비싼 무기였다. 톰슨 기관단총은 원 개발국 미국에서도 정당 현재 가치로 3천달러가 넘는[* 당시 가격을 현재 가격으로 치환한 값. 지금은 민간 시장에서 정당 2만 달러가 넘는다.] 굉장히 비싼 무기였다. 여기에다 독립군이 무기를 구하는 루트는 대게 중국 [[군벌]] 세력의 밀수품을 구입하는 식이었다. 총 자체의 권장소비자가격(?)에 군벌이 남기는 마진까지 더하면 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른다. 당장 [[자유시 참변]]때 독립군이 무장해제에 반발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자기 돈 들여 무기를 비싸게 주고 샀는데 그냥 빼앗기게 되니 그냥 응할 수가 없었던 것. 다만 등장한 총기가 톰슨 M1928이 아니라 M1921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M1921과 M1928은 외형상 각인만 빼면 모양은 동일하다. 톰슨 m1921 기관단총은 1920년대 [[마우저 C96]]과 [[M1911]]과 함께 [[염석산]]이 세운 산서성 태원병공에서 자체 생산되고 있었으므로 중국에서도 희귀한 물건은 아니었다.(중국제 톰슨 M1921 각인의 중화민국 17년이 1928년이다.) [[파일:external/www.usmilitariaforum.com/post-9906-0-49691500-1436759166.jpg]] 또한, 염석산은 여운형과 친분이 있었고, 여운형을 통하여 중국에 망명한 안창남을 자신이 세운 비행학교의 교장으로 임명하는 등, 망명 독립운동가들을 휘하에 두기도 했으므로 임정이나 김원봉이 염석산 휘하의 독립운동가를 통하여 최신 무기를 구했다는 설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결혼식 총격 장면에서 속사포가 드럼 탄창을 떨어뜨리는데, 일반 45구경 탄피였다면 탄두가 빠져나간 부분이 매끈할텐데 떨어진 탄피를 잘 보면 공포탄피를 그대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안옥윤이 후반부 결혼식 총격전에서 [[38식 소총]]으로 강인국이 숨은 방의 문을 쏘는 장면이 있는데, 38식 소총은 엄연히 [[볼트액션]] 방식인데 반자동으로 3발을 쐈다. [[발터 PP|발터 PPK]]의 경우, "시대상으론 얼추 맞지만(1931년 개발) 당시 저 권총이 만들어질 당시는 일본이 독일과 동맹을 맺어 중국 수입이 불가능했기에 쓰기 곤란하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는 고증에 맞다. 독일과 일본의 관계가 크게 좋아진 뒤에도, 독일은 [[중일전쟁]] 직전까지 중국 국민당군에 독일제 무기를 대량으로 수출했다. 게다가 작중 시점인 1933년이면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로, 일본과 독일의 관계가 좋기는 했지만 아직 추축국 수준의 밀월 단계는 아니었다. 애초에 국민당 군복부터가 전간기 독일군 복식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독일 육군 산악부대용 전투모[* 1943년부터 챙을 더 넓히는 등 개량을 해 전군에게 범용 전투모로 지급했다.]에서 유래한 국민당 육군 특유의 전투모가 대표적이다. 되려 경술국치보다도 한참 전에 등장한 [[모신나강]]에 고증 오류가 있다. 최초 생산 시점이 1891년인 것만 보고 개량형들과 옵션 부품의 등장 시점을 조사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이다. 극중에 등장한 모신나강은 저격용으로 쓰기 위해 마운트를 부착할 자리를 마련하고 노리쇠를 90도 꺾은 모델(GRAU 코드 상 56-В-222А)인데, 이 모델은 1932년부터 최초로 양산되기 시작했다. 그 살떨리는 스탈린 시절에 갓 실전 배치된 최신 무기가 1년만에 국외로 유출되는건 다소 무리한 설정. 게다가 장착된 조준경은 PU 스코프인데, 이건 아예 극중 시점에서 7년 지난 1940년에 등장한 물건이다. [[SVT-40]]의 옵션으로 개발되었기 때문. 거기다 정작 [[https://s.doubanio.com/view/photo/photo/public/p2261764634.jpg|조준망 표시]]는 십자 모양이다. 고증을 지키려면 노리쇠가 수평인 일반형 모신나강을 시모 하이하처럼 맨눈으로 운용해야 한다.[* 조준경이 달린 저격총을 등장시키고 싶었다면 하와이 재미교포들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설정으로 미국제 사냥총을 등장시키거나, 당시 개발중이던 97식 저격소총을 시제품을 빼돌렸다는 설정으로 등장시켰어야 했다.] * 결혼식 장면에서 안옥윤이 접시를 던져 문 뒤의 일본군의 위치를 파악하고 3발을 연속으로 발포해 사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안옥윤이 들고 있던 총은 [[볼트액션]]식 소총으로, 매발 수동으로 노리쇠를 당겨 탄피를 배출하고 재장전해줘야만 발사가 가능하다. * 전화로 정보를 전달하는게 나오는데, 그 당시에는 전화 교환원이 있던 시대이기에 도청당할 확률이 좀 높다. 지금처럼 번호 찍어서 전화하는게 아니라 교환원에게 누구에게 전화할 것인지를 말하고 이를 교환원이 연결해 주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전화 교환원은 한 회선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해주는 역할만 하고 연결 후에는 다른 회선의 연결을 위해 다른 전화 연결 요청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꼭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동시에 수십 통의 통화 내용을 다 듣고 그것의 내용을 판별하는 것은 회선마다 감청을 위해 인원을 배치하거나 컴퓨터의 등장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도청 대상이 특정된 경우에는 100%라고 할 수 있지만, 이건 교환원의 존재 유무와는 관계 없다. 그래도 도청 위험이 없는 건 아니라 다소 경솔한 선택이었을 수 있긴 하다.[* 이 당시 [[일본]] [[특별고등경찰]]의 수사방식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몰론이고 본국인 [[일본]]에서조차 시민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했을 정도로 굉장히 악명높았다. 전화 도청은 몰론이고 심지어 사람이 많은 번화가나 식당, 다방 등등에 민간인으로 가장한 사복경찰들을 대거 풀어놓아 혹여라도 반정부적인 발언이 한마디라도 들리는지 일일이 추적을 했을 정도. 이 때문에 아무생각없이 내뱉은 한마디때문에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경찰서로 끌려가서 혹독한 조사를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했어서 기본적으로 말조심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게다가 식민지 조선의 경우 비교적 식민통치에 대한 반항이 거센 곳이었기때문에 그만큼 통제가 더 심할 수 밖에 없었고.] 소설 [[태백산맥(조정래)|태백산맥]]에서도 이 때문에 전화로 내용을 제대로 알리지 못해 어떻게 알릴지 고민하는 내용이 나온다.[* 역시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조정래)|아리랑]]에선 "조독만이 아비입니다."라며 암호로 내용을 전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조독만은 '조선독립만세'의 약자다.] * 자동차의 운전석: '''모든 차량의 운전석이 좌측에 있다.''' 물론, 대다수의 차량을 미국에서[* 임시정부에서 운용하는 [[포드 모델 T]], 그외의 모델 A와 링컨 K 등] 수입하였기에 그렇다고 넘어가더라도 '''일본군이 운용하는 트럭까지도 좌측 운전석을 사용한다는 게''' 문제다. 자동차 자체는 좌핸들 자동차를 쓰더라도 적절한 편집을 통해 좌핸들 자동차라는 사실을 숨기는 연출을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운전석이 나오는 장면에서 좌우반전 효과를 썼어도 좋았을 것이다. * 김구와 김원봉은 영화에서 시종일관 협력적이고 동지적인 관계로 등장한다. "약산 김원봉이~" 와 "선생님"이라는 살가운 호칭으로 일종의 연대 의식을 표출하는 장면이 나오고 영화 내내 각각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의 수장인 좌우익의 거두가 잡음 하나 없이 연대하는 식. 하지만 사실 김구와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내내 견원지간의 앙숙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는 것은 독립운동 전체의 세력이 미력해진 1941년이었으며, 힘을 합친 후에도 김구와 김원봉은 끝없이 정쟁을 벌였다.[* 사실 김구는 흔히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정적들이 적지 않았고, 공산주의/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의혹도 있다. 이 때문에 김구를 까는 사람들 중에는, '김구나 이승만이나 똑같은 사람들인데 박정희가 이승만을 깎아내리려는 목적으로 김구를 띄워주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 둘이 1941년에 손을 잡은 이유도 이 둘을 금전적으로 후원하던 [[장개석]]의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가 서로 한살림 차리라고 일방적으로 강요를 한 탓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손을 잡은거에 더 가깝다. 안그러면 돈줄을 끊어버리겠다는 식으로 저쪽에서 나와버리는 바람에(…).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찌저찌해서 억지로 다시 만나게 된 것.][* 심지어 [[김원봉]]은 임시정부 내 서열2위인 군무부장이 되고나서도 임시정부에 대한 시선이 끝까지 곱지 못했는지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중국국민당]]의 [[우톄청]]과의 대화에서 대놓고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는 반일 황족 정권을 계승한 것도, 망국 후 민족 해방 운동가들이 공동으로 조직한 자유 정부도 아니다"'''라고 맹비난까지 한 대화기록이 2022년 4월 11일 중국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를 통해 공개까지 되었을 정도.] 영화에서는 해방 직후 김원봉이 죽어간 동지들을 김구와 함께 추모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해방 직후 김원봉은 상해 임시정부는 정통성이 없으므로 해산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김구 일파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은 바 있다. * 영화 스토리상 염석진이 1949년 반민특위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왜냐하면, '''반민특위가 한창 진행되던 1948년부터 1949년 사이는 엄연히 김구가 살아 있었을 때이다.''' 이미 염석진이 밀정이라는 것을 김구가 알고 있었고, 버젓이 1949년까지 경찰 노릇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노덕술을 모티브로 했다는데, 노덕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친일파였고 염석진은 중간에 배신한 밀정이다. 즉, '''만약 실제 역사에서 염석진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해방되자마자 김구가 바로 죽였을거다.''' 보통 독립운동가라는 점에 비해 잘 안 알려져 있지만 김구는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강경파의 대명사로, 굉장히 많은 이를 테러, 암살했다. 오죽하면 김구를 비판/폄하하는 '킬구'라는 별명도 있다. 하여튼 심지어 거물급 정치인들도 쉽게 죽이는 김구가 이미 해방 이후 엄청난 정치적 파워를 가진 상태에서 염석진 같은 배신자 하나를 살려둔 것은 다소 이상하다. 하다못해 염석진이 불안해하거나 망명을 가거나 했다면 모를까 말이다. 아마 영화 스토리상 반민특위로 엔딩을 해야 마무리가 되니 그런 것 같은데, 김구가 왜 1949년까지 염석진을 살려두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추가되지 않아 개연성이 떨어진다. 영화 끝부분에 김구가 염석진의 존재를 눈치채고 안옥윤과 명우에게 임무를 주는 장면이나, 혹은 안옥윤에게 일부러 끝까지 미츠코인 척 하고 염석진과 접촉해서 정보를 빼오라고 김구가 지시를 했다는 이야기가 추가되어야 맞을 것이다. 물론, 해방 후 반민특위 이전에 친일반역자들은 왜정시대 지위 그대로 해방 후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죽이기가 어려운 것이기도 하였을 거고,[* 실제로 노덕술 등 많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그랬다.] 염석진이 반민특위에 넘어간 것을 알고는 김구가 굳이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 기다렸던 것일 수 있다. 증인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처벌을 받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증인이 암살되며 무죄로 나오게 되자, 만일을 대비해 준비한 (또는 처벌이 무산되었을 경우 처단하라는 김구의 지시를 받고 대기하던) 옥윤과 명우가 급히 염석진을 처단한 거라면 말이 된다.[* 사실 해방 이후 김구가 백색테러 대상으로 노린 이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보다는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나 [[여운형]], [[박헌영]]처럼 같은 독립운동가지만 사상차이와 정치노선으로 인해 대립을 하던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장덕수]]정도가 [[친일반민족행위자]]출신이긴 했지만 [[장덕수]]가 테러대상이 된 이유도 단순히 친일파여서가 아니라 그가 이끌던 [[한국민주당]]이 더이상 [[한국독립당]]을 정치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미군정의 신탁통치에 조금이나마 유한 태도를 보여서였고 앞서 언급된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여운형]], [[박헌영]] 등도 비슷한 이유에서 테러대상이 된 것이기도 했다. 김구 입장에서는 신탁통치에 대해 찬성하는 것 자체가 나라를 팔아먹는 반민족행위라 보여졌을 수도 있겠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