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고기 (문단 편집) ==== 중화권 ==== [[중국]]은 이 양고기 문화를 가지고 [[화북]]과 강남으로 대표되는 북중국과 남중국을 구분할 정도로 양고기 문화가 지역 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중국은 신석기 시대부터 북방에서는 양과 소를 키운 흔적이 발견되며, 특히 중국의 봉건제과 국제질서의 시초가 된 [[주나라]]의 경우 [[강족]]과 함께 서북 지방에서 성장한 유목민 문명이었기 때문에 양이 일찌감치 중국에 있었다. 때문에 주나라 시대의 제례에서부터 양을 핵심적인 희생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양고기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중국의 양에 대한 유물과 기록은 최소 5000 여 년 전의 것이며, 미토콘드리아 분석을 통해 확인한 결과 이 시점에 이미 중동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초기의 양 유물은 강족이 있던 감숙성과 산시성의 유적이며,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중원 평원으로 전파되었다.[*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abs/pii/S0305440310004188] 역사 기록과 대조하면 주나라의 확장과 거의 일치한다. 이 시절의 양들은 현대 중국 양 토종품종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어째서인지 동아시아에는 고대에 양(sheep, Ovis aries)이 없었고 고대의 것은 염소란 말이 인터넷 등지에서 도는데 잘만 키웠고 고유 품종도 있다. 고대 중국어가 둘 다 양이라고 썼다는게 와전된 듯. [[청나라]] 때에는 북경 인근에서는 양고기 요리가 대세였다.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조선 사신들을 대접한다고 양고기 요리를 해주었는데, 양고기에서 나는 노린내 때문에 조선인들에게는 고역이었다고 한다. 참다못한 박지원이 상대방에게 농담 삼아 "대국 요리는 제법 노린내가 난다." 했다가 상대방이 무안해하자 서둘러 사과한 적도 있다. 다만 박지원이 방문한 지역은 [[만주]]와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북중국 지역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 사회 전반에 양고기 문화가 퍼져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이후 [[박제가]]의 경우 그의 저서 [[북학의]]에서 조선은 소고기를 지나치게 많이 소비해서 농사에 지장을 주는 반면 중국은 소고기는 적게 먹고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다며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싣기도 했다. 이무렵 만들어진 것이 [[중국]] 동북 3성 지방의 어린 양꼬치/[[양갈비]] 요리. [[한국]][*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이런 중국 동북인들이 운영하는 양꼬치집이 있다. 적당히 연하면서 기름지고, 양고기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 포인트.]과 [[일본]]에서 별미거리 안주거리로 상당히 인기를 얻어 중국 양고기 요리의 대표요소까지 되어버렸다.[* [[정상훈]]은 [[SNL 코리아]]에서 이 요소를 탁 집어 '양꼬치엔 칭따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히트친적도 있다.] 하지만 사실 중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양요리는 양탕(羊湯 혹은 [[양갱|羊羹]][* 두 메뉴는 조리법이나 완성형태가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먹는건 "탕"])이다. 외식메뉴로도 각광받는 카오양(烤羊, 양고기 구이)[* 메뉴판에 '''반 마리, 한 마리''' 이런 식으로 표기되어있는데 대략 반마리면 4~5명이서 먹을 수 있다고 보면 된다.]을 먹기 전에 보양삼아 먹는것은 필수코스고, 별도로 한끼 식사용으로 만든 양탕도 인기있다. 정말 간혹가다가 국수를 말아먹기도 하는데 마치 설렁탕면같은 느낌. 이들은 서북쪽의 위구르족(후이족) 양고기 요리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한데, 현지 위구르 자치구에 가면 말 그대로의 통양구이도 볼 수 있다. [[탄카오루양]]이 통으로 어미양과 새끼양을 구운 양고기 요리다. 전술했듯 중국 길거리에서 파는 노점에선 양의 생식기도 꼬치로 판다. 영어로 Sheep Penis(...)라 적어두기도 한다. 맛은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남중국 지역의 경우 북중국 지역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우선 강남 지역이라고도 불리는 남중국 지역은 여러 큰 강을 중심으로 습지 지역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날씨 또한 고온다습한 기후였기 때문에 양을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거기다 이런 기후로 양모의 수요 또한 많지가 않았다. 그리고 쌀과 과채 농사가 매우 잘 되고, 환경적 요인으로[* 기본적으로 돼지를 키우기 위해서는 거의 습지 수준으로 우리를 조성해줄 많은 물과 돼지가 좋아하는 더운 기후, 그리고 돼지에게 먹일 곡물이나 견과류 등이 마련되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남중국 지역은 덥고 습한 기후와 풍부한 수자원, 탁월한 식량 생산으로 돼지를 키울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던 것이다.] 돼지 목축 또한 매우 용이했기 때문에 양고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목화]] 등의 면작물 농사가 매우 일찍 시작되어 다양한 식물성 섬유로 옷을 만들어 입었기 때문에 양을 키울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남중국 지역은 일찍부터 [[견직물]]이라는 품질 좋고 생산성 좋은 동물성 섬유가 등장하여 중요한 산업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양 목축 문화가 자리 잡기가 힘들었다. 즉, 농업 생산 외의 다른 분야에 투입될 수 있는 잉여 노동력과 자본이 양모 산업 대신 견직물 산업에 투입되어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했기 때문에 남중국 지역에서 양이란 그야말로 "북쪽 사람들이 키우는 이상한 냄새나는 동물"이 된 것이다. 때문에 여러 유목민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양고기 문화가 널리 퍼진 현재에도 중국에서 양고기 문화의 남방 한계선은 [[우한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장강 중류 지역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이촌향도 현상이나 교통과 물류, 통신의 발전 그리고 소득의 향상으로 인해 남중국 지역에서도 이전에 비해 양고기가 제법 흔해졌으나, 여전히 남중국 사람들 가운데에는 양고기를 낯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남중국 지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대만에선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는 언어들을 사용하며 혈연적으로도 [[폴리네시아인]]들과 친척 관계에 있는 [[대만 원주민]]들이나, 남중국 출신 이주자들의 후손들이 주류인 [[본성인]]들의 경우에는 돼지고기 문화나 닭고기·오리고기 문화 그리고 염소고기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일본 제국 통치 아래 소고기 문화 또한 크게 발달했으나, 양고기 문화와는 큰 접점이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영향과 [[국부천대]]를 전후로 밀려온 북중국 출신 [[외성인]]들의 영향으로 일본과 북중국 지역의 양고기 문화가 도입됐으나, 여전히 북중국 출신 외성인들 및 그 후손들이나 중국 대륙 출신의 망명객들을 제외하면 즐기는 비율이 높지 않다. 애초에 외성인들 및 중국 출신의 망명객들 중에서도 본성인과 같은 남방 한족 혈통인 사람들이 적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외성인과 중국 출신들에게서도 양고기의 인기가 떨어진다. [[홍콩]]과 [[마카오]]는 각각 [[영국]]과 [[포르투갈]]의 지배에 따른 영향으로 다른 남중국 문화권에 비해 양고기 섭취가 많은 편이지만, 북중국 지역에 비해서는 매우 적은 편이다. 또한 홍콩과 마카오를 포함한 남중국 지역이 양을 키우기에 불리한 기후인지라 대체로 북중국 지역에서 생산된 양고기를 들여오거나 영미권에서 생산된 양고기를 수입하는 경우가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