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귀비 (문단 편집) == 개요 == > [ruby(一枝濃艶露凝香, ruby=일 지 농 염 로 응 향)] > 한 줄기 나뭇가지 농염한 이슬에 향기가 배어 > > [ruby(雲雨巫山枉斷腸, ruby=운 우 무 산 왕 단 장)] > 무산의 이슬비가 애를 끊네 > > [ruby(借問漢宮誰得似, ruby=차 문 한 궁 수 득 사)] > 묻노니, 한실의 누가 비길 수 있으랴 > > [ruby(可憐飛燕倚新粧, ruby=가 련 비 연 의 신 장)] > 아름다운 [[조비연|비연]]조차 다시 단장해야 하리라 >---- > [[이백(시인)|이백]], <청평조사>(淸平調詞) 8세기 초중엽 사람으로 [[현종(당)|당나라 현종]]의 며느리였다가 후궁이 되었다. '''양귀비'''는 이름이 아니라 양(楊)씨 성에 귀비(貴妃)[* 황후 다음 서열의 [[후궁]]이었다.]라는 직함이 붙은 호칭이다.[* 비슷한 예시로 [[희빈 장씨]]가 있다. 더군다나 오빠의 이름이 장희재라서 '희'자 돌림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본명은 전하지 않으나 도사가 되었던 시절 '태진'(太眞)이라는 도호(道號)[* 도사가 된 뒤에 도사로서 사용하는 이름. 승려들이 사용하는 [[법명]]과 같은 개념이다.]를 사용했기에 사서에서는 본명 대신 '''양태진'''(楊太眞)으로 칭했고, 옛 중국의 사대부들도 흔히 '양태진'이라 불렀다. 아명은 일부 사료에 따르면 '''옥환'''(玉環)[* 당나라 시대의 사료인 《명황잡록》(明皇雜錄)에 양귀비의 [[아명]]이 '''옥환'''(玉環)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는 '''옥노'''(玉奴)였다고 하며 중국의 대중들은 양귀비를 흔히 '''양옥환'''이라고도 불렀다. 양귀비의 눈동자가 푸른색이었고, 그래서 안녹산과 같은 색목인이었다는 설은 후대 사람들의 상상과 추측에서 비롯되었을 뿐 귀담아 들을 만한 가치가 없다. 사서에서 양귀비는 그저 한족으로 나온다. [[돌궐]](쾩튀르크)과의 전쟁에서 [[힐리가한]]이 포로로 잡혀 죽은 후, 50년 동안 평화가 찾아왔지만, 가한만 사망했을 뿐 돌궐족 자체는 동화되지 않고, 그 정체성은 살아남았다. 50년이 지난 후 돌궐 제2제국이 등장하면서 서역이 돌궐의 지배하에 들어갔기에 색목인들이 당나라에 이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