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귀비 (문단 편집) == 생애 == 양귀비의 본관은 포주(蒲州) 영락(永樂)[* 현 [[산서성]] 융지시(永濟市) 지역]으로 개원(開元) 7년(719) 용주(容州)[* [[광서성]] 지역]에서 출생했다. 중국에서 전하는 속설에 따르면 옥으로 된 고리{옥환(玉環)}를 손에 쥐고 태어났기에 부모가 아명을 '옥환'(玉環)으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은둔해 살던 선비가 어린 태진을 보고서 >'''"이 아이가 성장하면 황후와도 같은 자리에 오르리라."''' 하고 예언했다는 말도 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숙부의 집에서 살다가 개원 23년(735, 17세) 현종의 제18황자이자 무혜비 소생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 전 남편인 수왕 이모는 양태진과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했다가, 양태진이 귀비가 되었던 천보 4재(745)에 위소훈(韋昭訓)의 셋째 딸 위(韋)씨를 새 왕비로 맞았다. 이후 후처인 위씨와 다른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자식들을 무려 5남 22녀나 두었다.]가 되었다. 개원 25년(737, 19세)에 현종이 총애하던 후궁인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우울해진 황제를 달래주기 위해 환관 [[고력사]]를 포함한 여러 대신들은 현종의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며느리인 수왕비가 아름답다고 이야기를 듣고 개원 28년(740, 22세), [[황제]]가 온천궁(溫泉宮)에 행행(行幸)했을 때 고력사를 포함한 대신들은 수왕비 양씨를 황제 앞에 소개해준다. 현종은 한 눈에 수왕비에게 반하지만 시아버지가 엄연히 아들의 아내이자 며느리를 강제로 데려와 후궁으로 삼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현종은 양옥환을 남편인 수왕 이모의 왕부에서 나오게 한 다음, 일시적으로 도관(道觀: 도교사원)에 출가시켰고, 옥환은 '태진'(太眞)이란 도호를 받아 여도사(女道士)가 되었다.[* 이는 아들 수왕과의 합법적인 이혼을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양옥환이 여도사가 되면서 과거 '''수왕의 아내이자 현종의 며느리''' 라는 신분을 세탁하는 것도 있었다. 더구나 당시 도교의 여도사들는 비구니나 수녀들과 달리 연애가 금지된 것이 아니었기에 원하지 않는 결혼을 피하는 수단으로 여도사가 되는 여성들도 많이 있었다.] 이때 현종의 나이는 56세, 양태진과의 나이 차이가 33살에 달했으니 당시 중국의 평균 수명을 따져보면 할아버지가 묘령의 아가씨와 정분이 난 꼴이었다. 게다가 시아버지가 머느리를 빼앗고, 졸지에 아내를 빼앗긴 아들 수왕은 아버지가 총애했던 무혜비의 친아들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며느리가 시어머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른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후 천보(天寶) 4재[* 당현종은 744년부터 '년'(年) 대신 같은 뜻인 '재'(載)라는 글자를 쓰도록 명령했다. 이 조치는 [[당숙종]] 시절인 758년까지 지속되었다.](745, 27세) 때 현종은 정식으로 양태진을 귀비(貴妃)[* 측천무후 이후 사라졌던 작위였다. 당현종 당시는 황후 아래로 3명의 비(妃)가 있었는데 숙비, 덕비, 현비처럼 정해진 작호가 아닌 봉호를 수여받는 형태였었기에 여비, 혜비, 화비가 있었으나, 현종은 양귀비만을 위해 세 비들의 위에 서는 귀비 작위를 되살렸다. 당현종이 양태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로 책립했다. 비록 황후는 아니었지만 노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폐후 왕씨가 폐위된 후 현종의 황후 자리는 공석이었기에 사실상 양귀비는 황후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파일:external/www.e3ol.com/201111110121061450.jpg]] 양귀비는 외모는 물론 가무(歌舞)에도 뛰어났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눈치 빠르게 행동하는 총명함도 겸비했기에 현종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 잡았다. 현종은 그녀에게 '''해어화'''(解語花)[* '말을 알아듣는 꽃', 즉 얼굴만 예쁜 꽃 같은 후궁이 아니라 '지적인 여자'라는 뜻이며 현재는 양귀비를 상징하는 말로 자리잡았다.]라는 별명을 붙어 주었고, 동시대의 [[이백]]은 그녀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으며, 당대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에 꽃이 지었다며 '''수화'''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무혜비의 죽음으로 허해진 마음과 늦게 불타오르는 사랑에 빠진 현종은 양귀비에 대한 총애를 아끼지 않았다. 먼저 양귀비가 간택되자마자 승은 놀이를 단번에 폐지했으며 온천을 좋아하는 양귀비를 위해 온천 궁궐인 화청궁으로 조정을 옮겨 국정에 임했다. 또한 양귀비의 옷을 만드는 전문 인력만 무려 700명을 두었으며, 그녀가 남방(南方) 특산의 [[리치(과일)|여지]](荔枝)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다. 게다가 현종은 늘 틈만 나면 양귀비를 데리고 가서 달을 보는 놀이를 즐겼는데 이 놀이는 당나라 민간에도 널리 퍼져 오늘날 중국 중추절의 달보기 풍습이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현종의 양귀비에 대한 총애는 그녀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양귀비의 부모에게 각각 제국공과 양국부인이란 시호를 추증했으며, 천보 7재(748, 30세)에는 양귀비의 세 언니를 한국(韓國)·괵국(虢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했다. 특히 이 세 국부인은 해마다 1천 관(현재 시세로 5억 원)이나 되는 후원을 받고 양귀비를 따라와 황실 잔치에 참여하는 등 황족 이상의 엄청난 대우를 받았다. 게다가 이임보를 대신해 친척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이 재상 자리에 오르면서 양귀비의 많은 친척들이 [[고관대작]]으로 발탁되었고, 농서 이씨 황족과 [[통혼]]했다.[* 대표적으로 양씨 가문은 앙귀비와 현종과의 자녀가 없다보니 현종의 사후를 대비하고 황태자 이형(훗날의 당숙종)은 앙씨 가문의 확고한 지지를 받기위해 언니 한국부인 양씨의 딸 최씨를 태자의 장자인 광평왕 이숙(훗날의 당대종)의 정비로 시집보냈다.하지만 정작 이 혼사에 불만이 많던 광평왕 이숙은 황제가 된뒤 왕비 최씨를 추존도 하지도,최씨의 아들들을 태자로 지명하지도 않았고 측실인 심씨(훗날의 예진황후,당숙종 이괄의 생모)를 안사의 난때 행방불명이 된 뒤 아들인 서장자 이괄을 황태자로 삼고 황후 자리도 공석으로 해놓을 정도로 총애했다.] 훗날 [[백거이]]는 이런 상황을 <[[장한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後宮佳麗三千人 후궁에 빼어난 미녀 3천이 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3천의 총애가 한 사람에 머무르고 > >(중략) > >姉妹弟兄皆列土 자매와 형제 모두가 봉토를 갖게 되니, >可憐光彩生門戶 아리따운 광채가 가문에 나는구나. >遂令天下父母心 비로소 천하의 부모들이 >不重生男重生女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겼네. 그러나 현종과 양귀비로 인해 특권을 얻은 세 자매와 양씨 일족은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고 매관매직을 하는 등 당나라를 좀먹는 세력이 되어버렸다. 특히 그중에서 끝판왕은 양국충으로 양귀비의 뒷배만 믿고 각종의 국정 농단을 저질렀으며, 양귀비와 현종의 눈에 든 절도사 안녹산과 권력을 놓고 서로 반목하여 당나라를 파국으로 몰았다. 결국 천보 14재(755, 37세)에 양국충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세워 동북 변방의 번장 [[안녹산]](安祿山)이 [[안녹산의 난|대란]]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천보 15재(756, 38세)에는 안녹산의 군대가 수도 [[시안(도시)|장안]](長安) 가까이까지 치고 들어왔고, 귀비와 황제 일행은 사천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장안의 서쪽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진현례(陳玄禮)와 호위 병사들의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간신 양국충과 그 자매를 포함한 양씨 일족을 학살한 후, 모든 사단의 원흉인 양귀비를 처단하지 않으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겠다고 황제에게 항의를 했다('''마외병변'''). 물론 현종은 양귀비는 죄가 없다고 필사적으로 변호했지만 워낙 병사들의 기세가 드세어 도저히 달랠 수가 없었기에 결국 양귀비는 고력사의 도움을 받아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