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귀비 (문단 편집) == 기타 == * 양귀비는 [[중국]]의 4대 미인(美人) 또는 5대 미인 중 한 명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 언급되곤 한다. 다만 정사(正史)에선 양귀비를 '''자질풍염(資質豊艷)''' 즉 '''체구가 둥글고 풍만한 느낌의 미인'''이라고 묘사했고 양귀비 이전에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인 [[매비]]가 양귀비를 일컬어 '''비비'''(肥婢, 살찐 종년)라 욕했다는 일화[* 양귀비를 욕한 이유는 양귀비를 질투했기 때문이었다. 내려온 기록으로 미루어 봐선, 양귀비가 일방적으로 매비를 건들며 못 만나게 하여 매비가 양귀비를 매우 싫어하였다고 한다.]도 있었던 것 봐선 슬림하고 가날픈 체형이 미의 기준인 현대의 미인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타입으로 추측된다. * [[음모(신체)|음모]]가 엄청나게 길어 무릎까지 닿았는데, 그래서 소변을 보려면 궁녀들이 젓가락으로 음모를 들어주었다고 한다. * [[경국지색]]이란 악평과 양씨 일가의 만행과 달리 양귀비 자신은 정치나 권력 투쟁에 관심이 없었고, 현종과 음악을 즐기며 지내는 생활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오빠 양국충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안녹산이 장안을 방문했을 때, 살이 쪄서 뱃살이 무릎에 닿을 정도인 그의 외모를 재미있게 여겨 홀딱 벗겨 목욕시킨 후, 아기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돌아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현종도 그걸 보고 웃으면서 아기 씻긴 값을 주었다고 한다. 훗날 안녹산이 간신(양국충) 토벌을 명목으로 [[안녹산의 난|대란]]을 일으키고 양귀비가 자살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생각하면... 중국에서는 이때 양귀비와 안녹산이 '''사랑에 빠져''' 안녹산이 양귀비와 다시 한 번 만나기 위해 대반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의 희곡도 있지만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 [[야사(역사)|야사]]지만 양귀비는 [[겨드랑이]] 냄새([[암내]])가 심했다고 한다. 곁에 있던 시종이 솜으로 코를 막고 다닐 정도라, 양귀비는 항상 향이 나는 주머니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당현종은 고질적인 [[축농증]]이 있어 양귀비의 암내를 몰랐다고 한다. * [[아편]]의 재료인 [[양귀비(식물)|양귀비]]는 당연히 그녀에게서 따온 이름인데, 마치 마약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는 것에, [[경국지색|양귀비에게 빠져서 나라를 피폐시킨]] 당현종의 모습이 매우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잘 어울리는 작명이다.[* 당현종의 몰락에는 양귀비 한 명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이유들이 겹쳤지만, 양귀비 역시 원인이기도 하다.] * [[백거이]]의 유명한 시 <[[장한가]](長恨歌)>는 양귀비와 현종의 비극을 모티브로 했다. 이후 진홍(陳鴻)의《장한가전》(長恨歌傳)과 악사(樂史)의《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 등 윤색은 더욱 보태져서 양귀비와 당현종의 이야기는 로맨틱한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 원래 불타 죽은 사람은 양귀비가 아닌 시녀였으며, 양귀비는 도주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 도망간 곳이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양귀비가 돛이 없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상륙하여 땅에 쓰러졌는데, 야마구치현 주민들이 양귀비를 발견해서 구했고, 이후 거기서 더 살다가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전설을 기반으로 [[일본]]의 가수인 불세출의 가희 [[야마구치 모모에]]가 양귀비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야마구치 모모에 본인조차도 언론에서 이렇게 주장하여 원래 양씨라며 족보까지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계인 [[손정의]]가 자신의 성씨를 들어 조상 중에 중국계 혈통도 섞였다는 립서비스를 한 바 있었던 것처럼 조선시대 일부 양반들이 족보에서 성씨의 시조를 명망있는 중국계 인사들로 하던 유행에 맞물려 있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어서 썼다는 설이 약간 더 타당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