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김 (문단 편집) === 김대중의 정계 복귀와 [[15대 대선]] === 김대중은 영국으로 떠나고, 그 후로는 이기택이 단독 대표로 당을 이끌게 되었다. [[통일국민당]]은 군소 정당으로 전락해 사실상 [[민주당(1991년)|민주당]]만이 민자당에 대항하는 유일한 야당이 되었다. 이후 [[새한국당]]을 흡수해 당세를 확장해 가다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생긴 불화[* 이기택이 동교동계와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천한 장경우 경기도지사 후보가 민주자유당 이인제 후보에게 패한 것 등.]와 때마침 정계에 복귀 선언을 한 김대중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로 동교동계가 이동하면서 또 다른 막이 오르게 된다. 김대중과 새정치국민회의가 처음 맞닥뜨린 것은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로 아쉬운 패배였다. 야권 분열로 인해 민주계[* 새정치국민회의+통합민주당 의석수 합산] 의석은 98~95석에서 94석으로 오히려 줄었고 DJ가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한편 [[자민련]]은 충청, TK[* 민자당의 주류였던 상도동계가 민정공화계를 축출하면서 이들의 지지기반이었던 TK에서 反신한국당 기류가 생겼었다.], 강원에서 "녹색 바람"으로 두 배로 팽창, 25석을 늘려 50석을 만들면서 제 3당 사상 최대 의석을 만들게 된다. 이런 형국은 김대중이 김종필의 손을 잡아 DJP연합을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 15대 대선은 어땠을까. DJP연합을 바탕으로 DJ는 대선 3개월전부터 줄곧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한편 신한국당에서 통합민주당[* 이때 합당에 반발한 노무현 등의 영남계 의원들은 통합민주당을 탈당해 새정치국민회의로 들어온다.]을 합당해 만든 한나라당에서는 [[박찬종]], 이인제를 필두로 "9룡"이라 할 정도로 승부를 벌였으며, 결국 [[이회창]]의 승리와 [[이인제]]의 경선 불복으로 탈당, [[국민신당(대한민국)|국민신당]] 창당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다시 말해, 보수성향의 이인제가 제3후보로 출마하면서 DJ측은 더더욱 호재를 맞게 되었다. 게다가 [[1997년 외환 위기]]까지 겹치면서 김영삼 정부에 대한 지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생긴 이회창 아들들의 병역 비리 의혹, 일명 [[병풍 사건|병풍]]이 터지면서[* 대선 이후에 병역비리가 아닌 정당한 병역면제로 판결받았지만 이미 이미지는 크게 깎여나간 후였다.] 이회창의 지지율을 깎고 보수 스펙트럼이 겹친 이인제와 이회창의 표 나눠 먹기로 김대중은 [[당선]]된다. '''이로써 양김은 모두 한 번씩 대통령을 하게 된 것이다.''' 15대 대선이 끝난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대통령은 이 대선에 대해 "'''어려움속에서 선거의 명예혁명을 이뤄낸 국민들의 용기와 지혜에 경의를 표한다. [[김대중]] 당선자의 대통령당선을 축하하며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 힘을 모아 협조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712200020910101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0&officeId=00020&pageNo=1&printNo=23743&publishType=00010|선거 명예혁명을 이룬 국민들 지혜와 경의, 1997.12.20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712200020910201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0&officeId=00020&pageNo=2&printNo=23743&publishType=00010|김대통령 담화 의미 1997.12.20 동아일보]]]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 [[남북정상회담]] 개최, [[2002 한일 월드컵]] 개최 등의 빛나는 면과 [[비정규직]] 문제 확대, [[청년실업]] 문제, [[제2연평해전]], [[대구 지하철 참사|대구 지하철 방화 테러]] 등의 어두운 면이 공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