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김 (문단 편집) === 정계 진출 ===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은 1950년대에 20대의 나이로 정계에 뛰어들었다. 거제 지주의 아들이었던 김영삼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당]] 후보로 통영군 을(현 거제시) 선거구에 나가 역대 최연소 의원[* 만 26세 5개월, 현재도 '''깨지지 않았으며, 지역구로는 여전히 깨지기 어려운 기록'''이다. 다만 2022년 1월 18일, [[21대 국회]]에서 국회의원의 피선거권이 만 25세에서 만 18세로 개정되면서 비례대표로는 깨질 가능성이 높아졌다.]으로 당선된 이래, [[이승만]] 정권 연장에 반대하여 뜻이 같은 당원들을 모아 투쟁했으나 이승만에게 밉보여 자유당에서 축출당했다. 이후 민주당으로 옮겨가긴 했으나, 민주당 내에서도 민주당 구파의 휘하에서 빠르게 자신의 조직과 세력을 정비해 나가며 1964년에 가면 원내총무[* [[원내대표]]에 해당하는데, 이것 역시 역대 최연소다.]도 하는 등 이미 당의 중진 중 한 명으로 부상한 의원이었다. 반면, 신안 출신의 사업가였던 김대중은 한국전쟁에서 느꼈던 바에 따라 역시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첫 출마를 했으나 번번이 낙선만 반복하고 첫 부인도 잃기까지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결혼을 두 번 하였다. 첫 번째 부인인 차용애 여사와 사별하고 만난 사람이 [[이희호]] 여사다.] 장면의 눈에 띄어 민주당 신파의 휘하에 들어가서 대변인 활동을 기반으로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초선 의원이 되는 등[* 사실, 1961년에 보궐선거로 당선된 적이 있긴 하다. 문제는 당선 12시간 후 [[5.16]]이 터지는 바람에...] 가까스로 정계에 기반을 마련하고 그 특유의 연설로 막 유명세를 얻은 상황이었다. 다만 1968년 원내총무에 지명되었으나[* 이 당시 원내총무는 당수가 지명하고 경선은 형식으로 진행하는 식이었다.] 낙마해서 당의 핵심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미흡한 상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