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녕대군 (문단 편집) == 개요 ==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정치인]], [[화가]], [[시인(문학)|시인]]. [[태종(조선)|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남]]이자 [[세종(조선)|세종]]의 큰형. 엄밀히 따지면 태종과 원경왕후 부부의 4남이다. 태종은 양녕대군 위로 아들 3명을 더 두었지만 모두 어린 시절[* 다들 조선 건국 이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조선 [[왕조]] 공식 기록에는 그 3명이 없고 오직 태종의 언급만 있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장자 [[정통성]]을 강화하려고 일부러 기록하게 하지 않았으리라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태종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아다니다 못해 실록에 쓰지 말라는 일을 쓰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까지 쓴 것으로 유명한 그 민인생이 끼어 있었을 당시 사관(史官)의 꼬장꼬장함을 감안하면 "[[태종(조선)|주상]]께서 일찍 보내신 아들 3명은 기록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기록했으면 했지 쓰지 말란다고 안 썼을 가능성은 적다.]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선대왕 태조와 부왕 태종의 호색 및 냉혈 성향만 물려받은 인물로,''' 그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지만 '''[[뽀로로|"노는게 제일 좋아"]]'''. 술과 사냥, 여자 등 당대의 노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써 안팎으로 온갖 사고를 쳐 점점 부왕과 조정의 눈밖에 나더니 [[어리]]와의 [[간통]] 사건을 기점으로 폐세자가 되었고, 이후 동생 [[세종대왕|세종]]과 첫째 조카 [[문종]]이 병사한 뒤부터는 [[세조(조선)|둘째 조카]]가 일으킨 계유정난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만행까지 벌였다.[* 다만 일각에서는 단종 즉위 시점에 소헌왕후나 현덕왕후가 살아서 수렴청정을 했다면 양녕대군도 실제 역사에서처럼 수양대군을 지지하지 못하고 왕대비가 된 제수와 조카며느리를 인정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부터 미화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부터 이러한 미화가 나타난다. 사실 이러한 미화는 민간에서 자발적인 움직임도 있지만 세자가 [[양아치]]라 폐위되었다는 치부를 덮기 위해 조선 왕조 시절부터 벌인 역사깊은 위서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원인으로는 딸 셋을 제외한 아들 셋을 낳자마자 잃었던 이방원과 원경왕후 내외에게 양녕대군은 단순한 장남을 넘어선 특별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너무 [[오냐오냐#s-1|오냐오냐]]를 통한 [[자식]] 양육 방식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주로 제기되며, [[사도세자]]처럼 태종이 왕권강화책으로 써먹은 [[양위]] 쑈에 못 버티고 멘탈이 터져서 [[양아치]]가 된 거 아니냐는 썰도 있다.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는 일. 양녕대군의 도를 넘는 악행에 아버지 [[태종(조선)|태종]]은 결국 그를 폐위할 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