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방언 (문단 편집) == 생애 ==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학창시절 밴드 활동을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니혼의과대학(日本医科大学)에 진학하였다. 이는 그의 가정 배경 때문인데, 아버지는 재일 조선인([[조선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재일 한국인]]은 일반 기업에 취직하기 어려워,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이나 자영업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치과의사]]에서 [[외과]]의사로 전업했고 누이 중 두 사람이 [[약사]][* 그의 자서전 '프런티어, 상상력을 연주하다'에 의하면 첫째 둘째 누이가 약사고 셋째 누이가 마취과 의사다.]이며 나머지 형제들은 죄다 [[의사]]였다. 니혼의과대학 졸업 후 1년 동안 [[마취과]] 의사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도쿄대학]] 의대 정형외과에 들어갔을 때 연수과정 중 학업을 때려치우고 음악가로 전업을 하게 된다. 이후 [[일본]], [[대한민국]] 외에 [[중화권]]에서도 그는 음악가로서 널리 인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학업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절연을 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인정받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음악 활동 초기 20~30대에는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키보디스트와 프로듀서로서 활약했다. [[대만]]과 중국에서는 [[비욘드]]의 키보드 및 프로듀서로 더 유명하다. 1집을 들어보면 묘하게 록 삘이 나지 않는가? 장르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폭 넓은 지금과 달리 그때는 록과 퓨전 재즈 장르에서 주로 활동했다. 물론 업으로 한 일들이 그렇다는 거지, 프로듀스하면서 조금씩 작곡도 하고 클래식도 듣고 열심히 했다고 한다. [[조선적]][* 아버지가 [[조총련]] 계열이고, 어머니는 [[민단]] 소속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던 '특별한 환경'에서 성장했다.]을 가지고 있었지만, 1999년 [[대한민국]]으로 [[국적]]을 옮겼다. [[일본]]으로 귀화하면 성을 갈아야 하는 게 싫어서 국적을 대한민국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조선적]]을 가진 사람이 [[일본]] [[국적]]을 취득 시 [[일본국 정부|일본 정부]]는 '당신과 같은 성이 일본에 없다'는 이유로 일본식 성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양방언이 [[의사]]이기 때문에 국가에 도움이 될 인재였기 때문에 국적 취득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대신 성씨를 고치라는 뜻. 일본 국적 취득 후에도 자신의 성을 유지한 것은 아내의 성을 먼저 손씨로 바꿨던 일본 재계 순위 1, 2위의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정도. 다만 요즘은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축구선수 [[이충성]]. 그리고 조선적은 외국으로 나가려면 [[여권]]이 아닌 여행증명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여권]]을 받으려면 정식 국적이 있어야 한다.] 대학 진학 이전까지 [[조선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았다. 한국어는 재일교포 중 가장 잘 알려진 [[추성훈]]보다 좀 더 잘 하는 편으로, 일본식 발음이 거의 안 느껴질 정도로 유창하게 구사한다. 다른 재일교포와 비교하자면 현재는 완전히 한국에 정착한 [[슈(S.E.S.)|SES의 슈]] 정도.[* 억양에서 아주 살짝 일본식 느낌이 나기는 하나 언뜻 들어서는 잘 모를 정도의 수준.] 살아온 생애가 [[만월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와카오지 케이이치]]가 생각난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