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제(수) (문단 편집) ==== 무리한 건조 사업 ==== 경성 낙양에서 배를 타고 양주까지 유람하기 위해 양제는 용선과 대규모 선박 수천 척, 잡선 수만 척을 만들라는 무리한 지시를 내렸다. 이 작업에 투입된 인원만 200,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만들어진 대룡주(大龍舟)를 탔고, 황후와 후궁, 대•소 신료, [[승려]], [[도사]] 등은 그 뒤를 잇는 화려한 배들에 탔다, 제1차 남순때 양제가 탄 용주(龍舟)는 상하 4층이었고, 높이가 45척, 너비가 50척, 길이가 200척에 안에는 금과 은을 장식하여 인테리어가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으며, 배 안에서는 음주와 가무가 끊이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인 황후, 비빈, 대신들도 각각 배를 가졌으며, 수행선이 1,000척을 넘어서 행렬이 전후로 무려 100리나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선대가 지나는 곳에는 대량의 기병을 파견하여 호송하도록 했다.[* 실제로 수나라는 대규모의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때의 모습도 장관이라서 적힌 바에 따르면 칼과 창과 깃발이 마치 숲을 이룬 듯 했다고 한다. 또한 지나가는 군과 현은 도로를 닦아야 했을 뿐 아니라, 운하 500리 이내의 지역은 배가 도착하는 곳마다 지방관이 나와서 양제에게 온갖 진귀한 물품과 산해진미를 갖다 바쳐야 했는데, 그냥 요리도 아니고 그 지역의 가장 맛있는 요리만을 바쳐야만 했다. 이러다보니 양제가 지나가는 곳에 위치한 군과 현은 말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리게 되었다. 군, 현의 관리들이 앞다투어 요리를 바쳤는데 이때 양제에게 풍성하게 바친 자는 승진했고, 약소하게 바친 자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지방 관리들은 양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백성들을 쥐어짜서, 많은 민간의 재물들이 엄청나게 수탈당했다. 배가 떠날 때가 되면, 이 음식들 중에서 다 못 먹은 것은 '''그냥 그 자리에서 구덩이에 묻어버리고 떠났다.'''[* 참고로 전근대 중국에서는 황제의 식사에 올랐던 음식은 잔반조차도 황제의 하사없이 함부로 먹으면 '''사형'''이었기에 감히 손도 못댔다고 한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왕족과 궁녀, 환관, 신하들이 나눠먹는것이 일반적이라 낭비되는 일은 적었다. 명청대에는 아예 식당에다가 남는 음식을 내다 팔기도 했을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수양제가 그런쪽으로 머리를 쓰는 인간이 아니라서 뒷처리를 제대로 안한것이다. 물론 목숨 걸고 몰래 파내 먹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쯤 되면 양제가 정말 변호의 여지가 없는 극악무도하기 그지없는 대폭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먼 훗날에 집권한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도 [[흙]]과 [[인육]]까지 먹어야 할 정도로 [[고난의 행군|극심한 기근]]에 시달린 국민들을 무시한 채 광기에 가까울 정도의 [[미식가]] 생활을 이어나갔으며, 연회에서 먹다가 남긴 음식들을 죄다 땅에 파묻어버렸다.] 이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집안 살림이 거덜날 정도로 가산을 탕진했다. 거기다가 당시 양제의 배는 그냥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서 차출된 백성들이 강 양편 언덕에서 끌고 이동했다. 배를 끄는 사람을 '전각'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을 모두 더하면 무려 80,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수양제/dragonship.jpg|width=100%]]}}}|| || 다른 그림의 배이지만 대략 크기나 형태는 비슷할 것으로 보이는 '''대용주'''(大龍舟)의 모습이다. 경주용의 용주하고는 반대로 [[정크선]]이다. || 그외에도 강남 놀이가 싫증이 나면 양제는 생각을 바꿔서 서북쪽으로 행차했다. 양제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아첨꾼과 간신들이 서역 소국들의 국군과 사신들을 후한 선물로 꼬드겨서 양제가 지나는 길에 무릎을 꿇고 영접하도록 했으며, 그들의 접대를 받는 것에 양제는 만족해했다. 또한 북방에 유람을 떠나다가 길이 막히면 태행산에 굴을 뚫었고, 근처 백성들을 동원하여 대로를 건설했으며, 100만여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20일 만에 장성을 쌓기도 했다. 이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 당연히 기일이 늦어지기 마련이었고, 그 때문에 커다란 눈보라의 습격을 받아서 양제의 북방 원정을 수행하던 병사들 상당수가 동사했다. 말이나 노새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어, 거의 열에 아홉 정도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