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제(수) (문단 편집) ==== 민심의 악화 ==== 당시 양제가 지나는 곳마다 해골이 땅바닥에 널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과거에 [[백성]]들은 [[홍수]], [[가뭄]], [[메뚜기]] 떼 같은 천재지변을 가장 두려워했지만, [[가정맹어호|양광이 황제로 있는 동안에는 양광의 놀이에 따른 재난을 더욱 두려워했다.]] 해마다 거르지 않고 놀러 나가는 양제의 놀이 행렬은 인원이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했고, 이 행렬은 온갖 명목을 붙여서 백성의 재산을 쥐어짜냈다. 이런 무지막지한, 거의 약탈에 가까운 행렬이 지나가고 나면 지방의 재정은 바닥이 났고, 백성들은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당시 천재지변에 희생당한 사람보다 양제의 무분별한 놀이와 그에 따른 대재앙으로 희생당한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 신하들이 왕이 사냥을 나가고자 하면 앞장서 뜯어말렸던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왕이 행차하면 수많은 부속 인원들이 딸려가는데 그것이 다 민폐였다. 그 부속 인원들을 먹이고 재우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파가 지나가고 나면 그곳은 메뚜기 떼가 지나간 곳과 마찬가지로 황폐화 됐다고 한다. 그나마 정상적인 왕이면 보상을 해줬지만 대부분은 그마저도 없었다.] 주변 상황이 이렇게 [[막장]]으로 치닫게 되자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손이나 발을 잘라 노역을 면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여기서 '''복수복족'''(福手福足)이라는 말이 나왔다. 즉 팔과 다리가 없는 것이 [[복]]이라는 뜻이었다. 이렇게까지 치닫고 노역할 [[남자]]들이 부족해지자 양제는 [[여자]]들까지 징용했다고 한다. 나중에 양제는 건축가에게 '이동식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했는데, 이 궁전을 [[관풍행전]](觀風行殿)이라고 칭했다. 관풍행전은 언제든지 조립과 해체가 가능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