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제(수) (문단 편집) ==== 제1차 공격 ==== >“고구려의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했다. 비록 [[전한|한]](漢)과 [[위(삼국시대)|위]](魏)의 거듭된 토벌[* [[한무제]]의 [[고조선]]-한 전쟁([[왕검성 전투]])과 [[관구검]]의 [[고구려]]-위 전쟁([[비류수 전투]], [[양맥 전투]])을 뜻한다.]로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많이 막히자 종족이 또다시 모여들어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이루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저 중화의 땅[* [[한사군]]]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인 것이 가득하다. >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도리를 어지럽히고 덕을 그르침이 헤아릴 수 없고, 간사함을 가리고 품는 것이 오히려 날로 부족하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아직 직접 받은 적이 없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하고 배반한 자들을 유혹하고 거두어들임이 실마리의 끝을 알 수 없고, 변방을 채우고 개척하여 경비초소를 괴롭히니, 관문의 딱따기(야간 순찰 때 맞부딪혀 소리를 내는 한 쌍의 나무 조각)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사람이 이 때문에 폐업하게 되었다. > >옛날에 정벌할 때 천자가 행하는 형벌에서 빠져 이미 앞에 사로잡힌 자는 죽음을 늦추어주고, 뒤에 항복한 자는 아직 죽음을 내리지 않았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길러,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를 침범했다. 또 청구(靑丘)의 거죽이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물가가 같이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도둑질하고 왕래를 막으며, 학대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이르고 성실한 자가 화를 당한다. 사명을 받던 수레가 해동에 갔을 때 정절(旌節)의 행차가 번방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고 하겠는가? > >이를 참는다면 누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인가? 또 법령이 가혹하며 부세가 번거롭고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권력을 쥐고 나라를 다스리며, 붕당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고, 뇌물을 주는 것이 시장과 같고, 억울한 자는 말을 못한다. 게다가 여러 해 재난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그치지 않으며 요역의 기한이 없고 힘은 운반하는 데 다 쓰이며 몸은 도랑과 구덩이에 굴러 백성들이 시름에 잠겨 고통스러우니 이에 누가 가서 따를 것인가? > >경내(境內)가 슬프고 두려워 그 폐해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돌려 내면을 보면 각기 생명을 보존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이도 모두 혹독함에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幽州), 삭주(朔州)에 이르렀으니 무고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기 위해 다시 올 필요는 없다. > >이에 친히 6사(六師)를 지배하여 9벌(九伐)을 행하고, 저 위태함을 구제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정책을 잇고자 한다. 지금 마땅히 규율을 시행하여 부대를 나누어서 길에 오르되 발해를 덮어 천둥같이 진동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칠 것이다. >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며, 군사들에게 경계하게 한 후에 행군하고, 거듭 훈시하여 필승을 기한 후에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건안]](建安)·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提奚)·[[답돈]](踏頓)·[[숙신]]·갈석(碣石)·[[동이]](東暆)·[[대방]]·[[양평]](襄平) 등의 길로, 연락을 끊지 않고 길을 이어 가서 [[평양성|평양]]에 모두 집결하라.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삼국사기에 기록된 수양제가 직접 작성한 '''[[선전포고]]문'''이다.]}}} 대규모 원정을 준비해야 했기 떄문에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당시 산동 해안에서는 전쟁에 필요한 배를 건조했는데, 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할 때 그러했듯이 완공 기한이 무척 촉박했고[* 10개월 안에 300척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즉, '''하루에 1척'''이다. 게다가 평범한 나룻배가 아니라 전쟁용 군함이니 크기는 물론 재료랑 내구성도 신경써야 한다. 이런 건조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도 어려운 수준이다.] 이에 기술자들은 밤낮없이 쉬지도 못한 채 물 속에서 일해야만 했다. 물에 불을대로 불은 하반신이 썩어 문드러져서 목숨을 잃은 자가 전체 인원의 40%에 육박했을 정도로 매우 참담했다. 또한 양제는 백성들을 징집하여 식량을 운반하기도 했는데, 운반 기구가 모자라 작은 수레까지 총동원했다. 하지만 식량을 많이 싣지 못하는데다가 길이 너무 먼 탓에, 가는 도중에 식량을 다 먹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막상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건네줄 식량이 없어서 백성들은 도주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1,000리나 되는 수송로에서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밤낮으로 군수 물자를 운송하다보니 병사하는 자, 피로에 지쳐 쓰러지는 자가 속출하여 시체가 길을 덮을 정도였다.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대고구려 전쟁 준비를 한 양제는 자신이 직접 612년 정월 '''113만 3,800명의 대군'''[* 이 정도 대군은 [[페르시아 전쟁]], 5호 16국시대의 [[비수대전]]과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이전까지 세계 역사에서 가장 많은 군사 수를 동원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현대에도 이만한 대군을 끌어 모으는 건 어렵다. 현대 [[한국군]]의 현역 장병들이 530,000명 정도이다.]을 이끌고 대대적인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선두 부대가 출발하고 나서 마지막 부대까지 출발하는 데만 40일이 소요되었으며 그 행렬이 자그마치 1,000여 리(400km)가 되었다. 좌장군 [[우문술]]의 군사 450,000명, 우장군 [[우중문]]이 이끄는 군사 450,000명의 실로 유례가 없는 엄청난 대규모 출정이었다. 그리고 양제 자신이 이끄는 병력 수만 해도 260,000명이었고 행렬은 200(73km)여 리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향해 진격한 수나라군은 며칠에 걸쳐 그 성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해 3월 고구려 국경 지역인 [[랴오허|요하]]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부교를 건설하여 고구려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부교가 [[메이드 인 차이나|불과 1장(丈:약 3m)이 모자라서]] 강을 건너기엔 짧았다. 이 장면을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에서는 고증대로 건너지 못하고 대규모 피해를 입는 것으로 묘사했다. 수나라 군사들이 부교를 건너지 못해 우왕좌왕하자 고구려군은 이 틈을 이용해서 수나라군에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결국 이 공격으로 강을 건너기에 앞서 많은 수나라 군사가 전장의 귀가 되고 말았다. 피해를 보고받은 양제는 부교 건설 책임자인 우문개를 불러내서 질타했고, 군사를 재정비한 다음 부교를 다시 만들어 도하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수나라군이 도하에 성공하여 고구려군을 공격할 수 있었다. 고구려군은 응전했지만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10,000명에 달하는 군사를 잃고 [[요동성]]으로 후퇴했다. 도하에 성공한 양제는 [[요동성]]을 겹겹이 포위했는데 이때 100만 명의 군사라면 함락은 시간 문제라고 오판했다. 당시 요동성은 평야성이었고 규모가 꽤 컸는데, 방어적으로 규모가 큰 평야성은 매우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태종 [[이세민]]은 요동성의 상황을 잘 공략해서 약간의 시간만 소요하면서 함락시켰다.[* 물론, 양광과 이세민의 군사적 역량은 차원이 달랐다.] 그 때문에 요동성은 방어력을 높이고자 성벽이 무척 높았는데,[* [[대포]]가 개발되기 이전에는 성벽 높이가 높아야 방어력이 높은 성이었다.] 높이는 '''30m'''인 데다가 주변의 산과 더불어 길이가 3.5km였다. 수나라군은 성벽을 올라가려 시도했지만 '''[[메이드 인 차이나|공성용 사다리가 요동 성벽보다 낮아 올라갈 수 없었고]]''' 후퇴한 뒤 다시 재정비하여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이 돌과 화살 세례를 퍼부으며 끈질기게 저항하여 올라가지도 못하고 다시 후퇴했다. 그러자, 성벽과 성문을 파괴하려 했지만 문제는 내구도가 중국의 성과 달라서 안 부서졌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성은 중국의 벽돌성과는 전혀 다른, 돌로 만든 석성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의 벽돌성은 중국에 있고, 석성은 한반도와 만주에 분포하고 있다. 황하 지대의 황토의 경우, <판축법>이라고 해서 흙을 틀 안에서 때리고 다져서 벽을 올리는데[* 이때, [[철근 콘크리트|지푸라기 따위를 섞어서 뭉치면]] 더욱 튼튼했다고 한다.] 웬만한 벽돌보다 튼튼하게 뭉친다. 게다가 이 흙은 벽돌로 구우면 경도도 높고 튼튼해서 중국에서 벽돌 건축이 발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고대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일관되게 사용되어 온 건축 기법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역시 목재와 석재의 부족 때문에 벽돌을 이용한 건축 기법이 발달했다. 반면에 [[부여]]와 [[고구려]]가 있었던 [[만주]], [[백제]]와 [[신라]]가 있었던 [[한반도]]에서는 [[화강암]]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보니 [[화강암]]을 이용한 석조 건축 기법이 발달해서 [[절(불교)|절]]에서 만든 석탑만 [[화강암]]으로 만든 게 아니라 성벽도 화강암을 통으로 잘라서 만들어 썼다. 본래 [[요동성]]은 중국이 요동 일대를 차지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성이었다.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빼앗은 성이었지만, 군사적으로 중요한 땅이라 성벽을 갈아엎은 상태였다. 아무리 벽돌이 판축 기법으로 만들어서 튼튼하다 하더라도, 거대한 화강암을 통으로 사용한 것과 내구성이 다르다. 거기다 성문과 다리도 화강암으로 만들어서 견고했다. 벽돌을 쌓으면 끝인 중국의 성과는 달리, 고구려의 석성은 쌓은 돌을 흙으로 에워 감싸서 더욱 단단했으니, 중국의 벽돌성을 기준으로 만든 수나라의 무기로는 당연히 부술 수가 없었다. 특히 수나라 군대는 판축 토성과 벽돌성에 익숙하고 [[청야전술]]을 겪어보지 못했다 보니 [[공성전]]에서 헤멨다. 그렇게 공격을 말아먹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설상가상으로 양제가 '''"자신의 명령 없이는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군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수나라 군대가 물량으로 밀어붙여서 지친 고구려군을 공격할 기회를 노려도 양제에게 먼저 보고해야 했다. 따라서 수나라 군대는 군사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공격을 해도 고구려군이 이 틈에 재정비를 하거나 수나라의 움직임을 먼저 눈치채 대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요동성에서 투항 의사를 내비친 한 고구려인이 "지금 요동성은 재정비를 못했으니 지금 공격하면 함락시킬 수 있다."고 했지만 그걸 또 다시 황제에게 보고하러 가서 시간 손실이 났다. 이러니 번번이 요동성 사람들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주었고, 뒤늦게 공격해도 이미 요동성은 재정비가 끝난 상태였다. 물론 배반 의사를 내비친 고구려인은 끝내 요동성주에게 들켜서 죽었다. 이에 [[우중문]]은 요동성 함락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여 양제에게 가까운 육합성을 먼저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양제가 이를 허락하자, 우중문은 요동성을 공격하여 고구려군의 눈을 돌리는 한편 일부 군사를 이끌고 육합성을 공격했지만 '''이 육합성도 고구려군의 철벽 수비에 밀려 함락시킬 수 없었다.''' 한편 수나라 수군의 장수 [[내호아]]는 수군 100,000명을 [[평양성]] 인근에 상륙시키고 나서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이는 양제의 명령을 거부한 거나 다름없었다. 양제는 출정 전에 각 장수들에게 육군과 수군이 협공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는데, 내호아는 전공에 집착한 나머지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려고 들었다. 이러한 집착은 끝내 패배로 이어져 고구려 [[영양왕]]의 동생 [[영류왕|고건무]]에게 수나라 수군의 절반 이상이 궤멸당했고, 내호아는 급히 물러나야 했다. 수나라 육군의 상황도 비슷했다. '''요하를 건너와서 요동성을 포위한지 벌써 6개월이나 지났지만 113만명의 수나라 군사 중 단 한 명도 요동성 성벽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내호아가 지휘하는 수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300,000명의 별동군을 편성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별동군은 그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더 큰 문제는 양제가 이 군사들에게 100일치 식량을 한꺼번에 줘버렸던 것이다. 직접 들고 가는 식량은 당연히 소량이어야 하고 목적지에 주둔한 뒤에 지속적으로 보급해야 정상이다.[* 괜히 고대의 전쟁에서 전투병보다 보급병 규모가 배 이상 큰 것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식량의 보존과 운송 등등 어려움이 많았고 전투병 또한 현대의 완전군장을 뛰어넘는 무게의 장비들을 들고 가야 했기에 그런 것이다. 전투병이 식량을 직접 운송해야 하나, 가다가 무기와 갑주는 버릴 수 없으니 자기가 먹어야 할 식량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제는 군사 개인에게 식량을 휴대하게 하고, 만약 식량을 버리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엄포했다. 결국 305,000명의 별동대는 수십 kg에 달하는 식량을 등에 업고 요동성에서 평양성까지 험난한 천산산맥을 하나하나 넘어가며 진격해야 했고, 무거운 군장 때문에 수나라 군사들은 갈 때마다 야음을 틈타 천막 속에서 몰래 식량을 땅에 파묻었다. 그로 인하여 수나라 군대는 식량이 떨어졌고 굶주려 싸울 힘이 없었다. 요동성에서 내호아의 패전을 들었을지는 알 수 없고, 처음 계획이 수륙합공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일이 지체된 양제가 별동대를 파견했으며, 이들에 대한 보급은 내호아가 담당해야 했을 수 있다. 사실 양제가 모지리도 아니고 요동에서 평양까지 100일 만에 갔다가 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평양성에 도달하기 전에 군량이 거의 소진되었고, 도착한 우중문과 우문술이 내호아의 패전을 알고 나서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에 서둘러 후퇴한 것과 연계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를 눈치챈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수나라 진영에 가서 거짓 항복을 청하며 동시에 수나라 군사들의 동태를 살폈다. [[우중문]]은 을지문덕이나 고구려의 영양왕이 올 때에는 반드시 잡으라는 양제의 기밀 명령에 따라 을지문덕을 포박하려 했으나, 우문술과 유사룡 등 주변 장수들이 항복한 장수를 잡아들이면 저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라며 반대하여 결국 을지문덕을 그대로 송환했다. 그러나 우중문은 나중에 [[여수장우중문시|이 작전이 별동대의 진군을 지연시키고, 겸사겸사 내부를 염탐하기 위한 거짓 항복인 것을 알아채고]] 을지문덕을 추격했다. 결국 살수([[청천강]])를 건넌 수나라 별동군이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이미 싸울 힘이 없는 수나라 군사들의 포위는 의미가 없어 퇴각을 결정했고, 후퇴 와중에도 이어진 고구려군의 기습 공격에 기진맥진한 수군이 살수를 건널 때 고구려군의 총공격을 받아 수나라 30만 별동군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때 수나라 305,000명 중 살아 돌아간 군사는 2,700명이었으며, 이것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었다. 이 소식을 듣자 양제는 크게 분노하여 [[우중문]]과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그해 10월 퇴각했다. 결과적으로 양제의 제1차 침공은 수나라의 처참한 패배로 막을 내렸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고구려-수 전쟁, version=51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