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제(수) (문단 편집) == 평가 == 전대의 [[유왕|서주 유왕]], [[이세황제|진 2세 황제]], [[초패왕|서초 패왕]], [[한환제|후한 환제]], [[한영제|후한 영제]], 오나라의 말제 [[손호]], 후조의 무제 [[석호]], [[유송]]의 [[전폐제(유송)|전폐제]] [[유자업]], [[후폐제(유송)|후폐제 유욱]], [[남제]]의 울림왕 [[소소업]], [[명제(남제)]] 소란, 동혼후 [[소보권]], 후대의 [[당의종|당 의종]], [[송휘종|북송 휘종]], 금나라 [[해릉양왕]], [[명 4대 암군]]의 [[백미]]인 신종 [[만력제]] 등과 함께, 이견의 여지가 없는 중국사 최악의 [[암군]]이자 [[폭군]]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은 '''[[중국사]]의 황제 중에서 최악의 폭군을 꼽으라고 할 때 바로 수양제를 거침없이 1순위로 꼽을 정도이다.'''[* 때문에 현재 양제의 무덤은 1,000년이 넘도록 변변한 관리조차 없어 훼손이 심하게 되어 있으며, 무덤에도 '''고구려에 가서 헛짓거리 하다 죽은 왕'''이라는 식으로 쓰여 있다. 또한 양제의 무덤이 있는 지역에 전해지는 민간 전승에 따르면 하늘의 신이 양제의 무덤에 벼락을 내려 무덤이 셋으로 쪼개졌는데, 사람들이 이를 보고 양제가 죽어서도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믿었다 한다.] 수나라는 다른 단명 왕조들과 달리 제도적인 모순이나 심각한 명분의 하자가 없었고 통치 기반도 탄탄했으며 지배 집단도 정상적이었다. '''오직 수양제의 폭정 하나 때문에''' 단 2대 만에 멸망한 것이었다. 당나라가 수나라의 통치 기반을 거의 비슷하게 물려받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양제가 차라리 범군이기만 했어도 수나라는 훨씬 오래 존속될 수 있었다. 사실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유왕|서주 유왕]], [[영제(후한)|후한 영제]], [[의종(당)|당 의종]], [[휘종(송)|북송 휘종]], [[만력제|명 만력제]] 등 망국의 원흉으로 꼽히는 최악의 암군들이 많기는 하지만 최소한 그들은 아버지와 형을 살해하고, 병중에 있는 아버지의 후궁을 노리는 등 패륜 행각은 저지르지 않았고, 황위를 찬탈한 케이스도 아니었으며, 직접 수많은 백성들을 살육하지도 않았고 굳이 무의미한 대외 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하고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망국의 원흉이라는 평가도 해당 황제들이 핵심 원인이기는 하나 최소한 전대 황제들이 쌓아온 여러 폐단이나 문제점들도 없진 않았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다. 이러니 '''패륜, 색욕, 황위 찬탈, 학살, 무리한 공역, 대외 전쟁, 처참한 패전, 망국''' 등, 폭군의 소양을 두루갖춘 양제의 추악함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다. 한국사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과 비교하면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후궁인 서모(庶母)와 이복동생을 살해했으나 수양제처럼 친아버지를 살해하지는 않았으며, 신하들에게는 '사화'라는 이름의 대학살을 저질렀으나 일반 백성들을 학살하지 않았다.[* 다만 직접 학살만 자제했지 양제의 사치스러운 전국유람과 비슷하게 연산군도 사냥과 놀이에 많은 재정을 쏟아붓고, 한양 도성 근처에 금표를 세워 출입금지구역으로 만들어 많은 백성들을 괴롭힌 부분은 겹친다. 뒤이어 반정으로 몰락한 광해군도 그렇지만 이는 연산군이 몰락한 원인 중 하나로,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끼쳤기 때문에 폭군으로 낙인찍혀 민심이 이반했고, 때문에 반정이 쉽게 성사된 이유로 꼽힌다.] 무리한 전쟁을 감행하지도 않았다. 연산군은 나라를 휘청거리게 만들기는 했으나 망하게 만들지 않았으니 연산군과 수양제를 비교하면 연산군은 양반으로 보일 지경이다. 세계사적으로 봐도 수양제 수준으로 멀쩡했던 나라를 망국의 길로 몰아넣은 인물은 직전 왕조인 [[북주]]의 선제 [[우문윤]][* 아버지 무제 [[우문옹]]이 강건하게 만든 나라를 고작 '''9개월''' 만에 무너트렸다. 결국 북주는 그의 사망 2년 만에 수나라의 문제 양견에게 넘어가게 되었다.]과 1,300년도 더 뒤에 집권한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 천연자원이 넘쳐나는 나라의 지도자로 있었던 데다가 [[냉전]] 시기에 [[반공]]을 내세워 서구권으로부터 당대 아프리카 국가 중 최상급의 원조를 받아왔으나, 그 돈으로 경제성장을 이루기는커녕 국가 GDP와 맞먹는 돈을 해외로 빼돌리고, 국민들이 기아에 시달리는 와중에 생일 케이크를 배달받기 위해 [[콩코드 여객기]]를 전세내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부패와 사치 행각으로 국가 1인당 GDP의 실질 가치를 [[6.25 전쟁]] 직후 대한민국만도 못한 수준으로 떨어뜨려놨다. 결국 자이르는 [[로랑 데지레 카빌라]]의 반군에게 수도 [[킨샤사]]가 점령당하며 멸망했다.] 정도밖에 없다. 수나라 직후의 당나라가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양제를 폄하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교차검증이 가능한 내용만으로도 최악의 폭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목격자가 없는 궁중 암투와 관련된 내용은 다소 부풀리기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양제가 전국을 유람다니며 수많은 백성들을 학살하고, 무리한 대외 원정을 기획하여 백성들을 사지로 몬 것은 당대 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일이었다. 수양제의 개인적인 품성을 봐도 문제가 많다. 양제는 군주가 절대로 가지지 말아야 할 성격들을 모조리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는 겸손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난 점만을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여 일찍이 신하들에게 "[[선민의식|사람들은 내가 선제의 유업을 이어 황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지금의 문인들과 겨루어서 그 실력으로도 황제가 될 수 있다!]]"며 큰 소리를 쳤다고 한다. 게다가 남이 자신에게 충고하는 것에 대해 매우 학을 뗀 탓에 간언하는 신하는 무조건 죽음으로 다스렸다.[* 공교롭게도 [[세조(조선)|묘호가 같은 조선 왕]] 또한 비슷한 성향이었다.] 그는 일찍이 명사 우세남에게 “나는 평생 남의 충고를 원치 않는다. 높은 관직에까지 오른 자가 입바른 소리로 명성까지 추구하는 꼴을 절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수서》는 이런 그를 두고 '''‘하늘 아래 원수 아닌 자가 없었고, 좌우 모두가 그의 적국이었다.’'''라고 혹평하고 있다. 그 결과 나라가 처참히 망하고 자기자신도 더 처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양광 본인이 천하의 사람들을 해쳤고 자기 자신도 해친 셈이었다. 그리고 양제가 한 행동에는 인간이 저지를 만한 거의 모든 사악한 범죄들이 다 포진해 있다. 아버지의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것으로 시작하여 자신의 형제들을 음해하고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며 자신을 따르는 [[간신]]들은 총애하고 충언을 하는 충신들을 죽일 만큼 음흉하고 잔혹했으며, 음탕하여 새어머니와도 같은 여자를 범하는 등 여자를 너무 많이 밝히고,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을 좋아했으며, 무리한 공사로 나라를 말아먹고, 대규모 전쟁을 일으켜 많은 국민들의 목숨을 잃게 했다. 또한 국정 운영을 방치하여 나라를 망가뜨리고 반란이 일어나게 하여 결국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것 등의 일들에서 나오듯이 수양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범죄를 저질렀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그런 악행들을 밥먹듯이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__전혀__'''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죽기 직전에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냐고 되물었다는 것을 보면, [[사이코패스]]가 아닌지 의심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 민족이 수양제를 특히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실패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성격과 기질이 정상적인 사람이 보았을 때 너무 지나친 탓이 컸기 때문이다.''' 수양제가 똑같이 국가 멸망의 씨앗을 뿌렸다고까지 평가받는 [[시황제]]보다 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의 통일과 여러 정치적인 면모만 보면 시황제의 부정적인 면과 후임인 이세황제 호해를 합친 아니 몇 배는 더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진숙보를 공격할 때 총사령관이 바로 양광 본인이었다. 잡힌 사람이나 잡은 사람이나 똑같은 시호를 받았다니 모순이다. 그나마 양제가 진행한 대규모 건설 행위 가운데 대운하만은 이후 당나라 시대에도 이어지면서 중국 전역의 영토 연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사실 대운하 건설은 언젠가는 반드시 할 일이었지만 양제가 너무 무리하게 다그친데다가 이거 말고 수많은 대규모 사업을 병행했기에 문제가 커졌다. 특히 위에 나온 대규모 용선이나 수많은 이궁 등 사치스럽고 규모가 엄청난 토목 공사들을 대운하 공역과 병행하는 바람에 수문제 시절 '개황성세'때 쌓인 어마어마한 국부가 순식간에 거덜났다. 관롱 귀족 집단과의 갈등도 패망의 지름길로 떨어진 원인이었다. 당나라을 세운 고조 이연이 속했던 호족 세력인 [[관롱집단]](關隴集團)은 [[북위]]의 초기 수도였던 평성의 방위를 위해 그 이북에 세운 군사기지인 6진의 하나인 무천진 일대에서 세력을 만들어 귀족화한 호족 가문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들 중 양견이 북주 우문씨 황실의 외척을 하면서 수나라를 개국했고, 당나라를 건국하는 농서 이씨 가문 또한 수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수나라]]의 창업군주였던 [[문제(수)|문제]]는 소규모 자작농을 대규모로 육성하여 황실이 그들을 직접 통치하는 것을 국가의 기본 정책으로 삼으려 했으나, 주요 권세가들은 소수의 귀족들이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며 황실은 이 귀족들을 통해 국가를 간접적으로 통치할 것을 국가에 요구하면서 반발했다. 이에 따라 외척 관계로 밀접한 사이였던 황실과 관롱집단이 중심인 주요 귀족들 사이에 긴장감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이런 긴장감은 상호간의 갈등으로 발전해 문제 양견은 귀족층의 대규모 숙청이라는 극약 처방을 단행했다. 당연히 귀족들이 눈뜨고 앉아서 당할 리는 없었고, 대규모 반란을 도모하나 문제가 직접 나서서 진압했다. 하지만 양견과 그 이후 황제가 지속적으로 족쳐서 와해시키거나 멸족시켰으면 되는데 그러기도 전에 양광이 탈법적으로 제위에 오르면서 문제가 벌어진 것이다. [[패륜]]으로 즉위했으니 명분적인 면에서 결함이 있었고, 어찌보면 양제는 좋으나 싫으나 황족들과 귀족들의 관심을 분산시키려 지속적으로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켜야 했을지도 모른다. 고구려 정벌도 그래서 벌인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제2차 침공부터는 병력 규모도 그리 큰 편도 아니었으니. 그러나 이것의 규모가 지나칠 만큼 커졌고, 여기에 사치스러운 본인의 성향과 맞물려 시너지를 일으킨 것이다. 사실 대운하는 수문제가 먼저 계획하고 시작했던 사업이었다. 허나 비용도 많이 들고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자 곧바로 중단시켰는데, 수양제가 이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 막장 테크 하이웨이를 충실히 탔다. 끝내 수 황실은 내부 황위 다툼으로 관롱집단을 와해시킬 기회를 스스로 걷어 차버렸고, 양제의 계속된 병크로 나라 꼴이 엉망이 되자 이씨가 나라를 차지한다는 참언으로 이금재(李金才)를 죽였으나, 관롱집단에 휘둘려 고조 이연에게 나라를 내줬다. 관롱집단은 [[당나라]]때까지 권세를 휘둘렀으나, [[태종(당)|당태종]] 시기 이후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해 [[측천무후]]의 숙청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현종(당)|당현종]] 시기에는 그저 명맥만 유지하다가, 그마저도 [[안사의 난]] 이후부터는 와해되고 만다. 여담이지만 수양제의 황릉은 최근까지도 '''수양제릉'''(隋煬帝陵)이라는 비석을 못보면 그냥 지나칠 만큼 초라한 몰골로 방치되어 왔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초라한 몰골 덕분에 [[문화대혁명]]의 광풍속에서 중국 역사상 수많은 위인들이 무덤이 파헤쳐지고, 부관참시를 당하는 막장 상황에서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용케 넘어갔다. 같은 묘호를 가진 수양대군과 비슷한데 실제로 두 군주는 친족을 죽이는 패륜을 저질러 찬탈하고 여러 실책들을 남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