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제(수) (문단 편집) ==== 위선 ==== 당시 수나라의 황태자였던 [[양용]]은 태자비 원씨가 죽었는데도 방종과 사치에 놀아나,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어머니 문헌황후의 눈 밖에 나버렸다. 물론 진왕 양광도 방탕하고 한 사치하는 성격이었지만 부모 앞에서는 자신의 본색을 철저히 숨긴 채 연기했다. 양광은 야심이 큰 사람이었고, 태자가 되기 위하여 온갖 술수와 농간을 부려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을 흐리게 했다. 수문제가 양광의 진왕부로 행차할 때 양광은 미리 젊고 농염한 미희들을 모두 숨긴채 늙고 추한 여자들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했다. 이런 식으로 부모에게 자신은 여색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을 은연 중에 상기시켰다. 이밖에도 줄이 잘리고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거문고를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놓아두기도 했는데, 수문제는 그것을 우연히 보고 양광은 자기처럼 즐기는 것을 멀리한다고 생각하여 크게 기뻐하기도 했다. 하루는 양광이 사냥을 나갔을 때 소나기가 내렸는데, 시중이 그에게 비옷을 건네주자 그는 입기를 거절하고 말했다. >'''"병사들이 모두 비를 맞고 있는데, 나 혼자 어찌 비를 피하겠는가?"''' 이 말을 들은 수문제 부부는 양광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한다고 착각했다.[* 이게 양광의 연기력 수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수문제는 고생을 해서 나라를 세운 [[창업군주]]에다가 [[중국사]] 내에서 손에 꼽히는 [[명군]]이며, [[문헌황후]] 또한 그런 수문제를 거의 파트너의 위치에서 보위에 올리는데 어마어마한 기여를 한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유능한 여걸이자 여성 정치인이다. 당연히 지도력 = 통찰력으로 인식되는 상황상, 통찰력이 발군이었을 것이 거의 확실한 인물들인데 아무리 평생 보아온 아버지, 어머니라지만 이런 인물들을 속인 것이다. 다른 형제들이 다 대수롭지 않았다는 운도 작용했지만 이런 연기력은 진짜로 무시무시한 수준이다.] 양광은 이런 눈속임을 통해 부모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수문제와 문헌황후에게 차기 황권 주자로 사실상 공인받은 것은 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계략을 써 태자 [[양용]]과 사이가 나빴던 [[양소(수나라)|양소]][* 양광의 장남인 원덕태자 [[양소(수 추존)|양소]]와 동명이인이다.]와 짜고 부모 앞에서 태자를 중상 모략하며 나쁜 아들로 매도했다. 특히 형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어머니 문헌황후가 태자를 찾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궁녀]]를 태자궁에 보내 술을 마시게 하는 등의 술수를 써서 양용에게 사치스럽다는 이미지를 뒤집어 씌웠다. 결국 이를 본 문헌황후는 "[[양용]]이 태자 자리에 있으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 판단해, 양광과 결탁하여 양용을 태자의 자리에서 쫓아내니, 서기 600년 양광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한편, 수문제가 병들었을 때 태자 양용이 수문제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고 양광이 모함했고, 이 모함이 성공하여 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자 자리에서 쫓겨나 방릉왕(房陵王)으로 강등당한 양용은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양광에 의해 막히자 궁궐 정원의 나무 위로 올라가 대성통곡을 하면서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으나 이 광경을 본 아버지 [[수문제]]가 오히려 '''"용 저놈이 광 말대로 이젠 완전히 미쳤구나!!"'''라고 확신하게 만드는 역효과만 낳았다고 한다. 이렇듯 양광은 '''연기와 쇼맨십에 매우 능했던 인물'''로, 겉으로는 청렴하게 살고, 의관도 누추하게 입었으며 여자를 탐하지 않는 연기를 제대로 보여주어 가족과 주위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