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제(수) (문단 편집) ==== 부황을 시해하다 ==== 그후 태자 양광은 대놓고 제위에 야심을 품었다. 당시 부황 문제는 일생을 [[공처가]]로 살아왔지만 막상 아내가 죽자 큰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그런 문제에게 예전에 자신이 멸망시킨 [[진(육조)|진(陳)나라]]의 [[선제(남진)|효선제 진욱]]의 14황녀인 [[선화부인]] 진씨[* 효선제 진욱과 시흥왕 시적봉의 딸 시희 사이의 장녀로, 진나라의 황녀로써 받은 칭호는 '영원공주'였다.]가 눈에 띄게 되었고, 문제는 진씨를 가까이 하다가 기력이 쇠해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점은 양광 또한 진씨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양광은 진나라를 멸망시킨 전쟁의 사령관이었다. 이때부터 진씨와 안면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가 604년에 문제가 중병에 걸려 장안의 인수궁 대보전에 누워있었는데 월국공 [[양소(수나라)|양소]], 병부상서 유술 등이 대보전을 지키며 황제의 시중을 들었다. 이때 양광은 자신이 제위에 등극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간파하고, 양소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황제 사후의 일을 상의했다. 양소는 양광을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으므로 그에게 대비책이 담긴 서찰을 보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양소의 서찰이 궁인의 실수로 문제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문제는 서찰을 읽고 진노했다. 그는 자신이 눈을 감기 전에 양광이 양소와 짜고서 제위에 오를 궁리를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즉시 양광을 소환했다. 이때 마침 문제가 총애한 진귀인이 울면서 대보전으로 뛰어들어왔는데, 그녀의 옷매무새는 헝클어져 있었다. 문제가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태자 양광이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긴 시간 철저하게 자신을 제어하며 부모를 속여 왔지만 양광도 결국은 방심과 제어할 수 없는 수준의 성욕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문제는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이 이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내가 황후의 말을 들은 것이 큰 실책이었구나!"'''라고 욕을 했다. 양광이 자신의 [[후궁]]을 노리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죽기를 바란다는 것, 즉 양광의 사악함을 눈치챈 문제는 조치를 취했다. 문제는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유술에게 태자 양광을 폐출하고 [[양용]]을 다시 태자로 삼으라는 [[조서]]를 쓰도록 했다. 그러나 양광은 수족들을 통하여 대보전 안의 상황을 [[손금]] 보듯이 환하게 꿰뚫고 있었다. 행동이 빠른 양광은 한발 앞서 심복들과 짜고 그날 밤에 즉시 병력을 동원하여 황궁을 에워쌌다. 그는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는 유술 등의 대신들을 죽이고 인수궁을 장악했다. 그리고 대보전에서 아버지를 시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지적처럼 양제가 문제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 무엇보다 수나라를 깎아내리고 당나라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편찬된 <[[수서]]> 문제 본기에서조차 문제는 노환으로 투병하다가 자연사했다고 되어 있다. 문제는 604년 4월 병에 걸렸는데 7월 10일 병환이 심각해지자 인수궁에서 백관들과 작별인사를 하며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고 7월 13일 사망했으며 국상은 8일이 지난 7월 21일 발표되었다. <수서> 본기에서는 문제와 양제 부자의 실책을 지적하는 논평도 실려 있는데 양제가 아버지의 상중에도 주색잡기를 즐겼다며 비판하는 이야기는 있어도 양제가 문제를 살해했다는 식의 서술은 없다.][* 양제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는 <수서> 선화부인 진씨의 열전에 실려있는데 문제가 병환으로 몸저 누웠을 때 양제가 아버지의 애첩인 선화부인을 겁탈하려 했다. 선화부인이 간신히 달아나 문제에게 이를 알리자 문제는 유술과 원암에게 폐태자 용을 불러오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양소가 그 사실을 양제에게 보고하자 양제는 유술과 원암을 감금하고 장형을 보내 앓아 누워있던 문제를 죽여버렸다고 한다. 양제가 시해된 방식은 기록에 따라 다른데 <대업약기>에서는 독살되었다고 하였고 <통력>에서는 장형이 문제를 살해할 적에 그 피가 병풍에 튀었다고 하였다. <수서> 방릉왕용전에서는 양제가 유술과 원암을 감금한 것은 문제의 사후였고 이는 곧 문제의 죽음을 틈타 폐태자인 형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 하는 등 전혀 딴소리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양제의 명령을 받들어 문제를 살해했다는 장형도 이런 음험한 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수서> 장형전에서는 장형이 문제를 살해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양제에게 간언을 아끼지 않았다가 사형을 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장형이 <수서> 편찬 시기에 문제의 시해범으로 둔갑한 것은 아마도 <수서> 양제기에서 언급되었듯이 양제가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그의 측근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뒤이어 형인 양용에게 조작된 유언장을 보내어 자결하라고 일렀으나 겁을 먹고 자결하지 않자, 자신의 근위장이었던 [[우문지급]]을 보내 그의 목숨도 빼앗아버렸다.[* 이 사건 때문인지 이후 [[우문지급]]은 그의 형 [[우문화급]]과 함께 수양제에 의해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문제가 세상을 떠난 그날 양광은 금으로 만든 함을 선화부인에게 갖다 주었다. 선화부인과 [[궁녀]]들은 양광이 준 함 속에 독주가 들어 있는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 함을 열자 독주가 아니라 사랑을 상징하는 '동심결'[* 두 고를 내고 맞죄어 매는 매듭. 납폐(納幣, 혼인할 때 사주단자의 교환이 끝난 후, 정혼이 이루어진 증거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예물을 보내는 일.)에 쓰는 실에 사용한다.]이 있었다. 이때 선화부인은 안도했다고 하며, 뒤이어 양광은 그토록 사모하던 선화부인 진씨를 강제로 [[강간|범(蒸)했다.]] 태자였던 양광은 제위에 오르자 그가 총애하는 선화부인을 진귀비로 책봉하여 그녀를 정식으로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물론 양광의 후궁은 선화부인 외에 매우 많았다.] 하지만 양제의 [[후궁]]이 된 지 1년 만에 병으로 겨우 29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한국'''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에서는 하술하듯이 이 인물이 [[팜므파탈]]식의 인물로 재해석되며, 일부러 고국 진나라의 복수를 하고 수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양광을 황제로 만드는 데 기여하면서 양광을 홀린 인물로 간주된다. 최후도 각색해 양광이 즉위하고 나서는 모든 목적을 달성했기에 그를 일부러 자극해서 저주를 퍼부었고 이때문에 화살을 연달아 맞아 살해당했다. 양제는 선화부인이 여러 개의 화살을 맞고 죽는 모습을 보며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화살을 더 쏘라고 명령하면서 광소를 터트린다.] 양제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모국을 멸망시킨 부자와 잠자리를 할 수 밖에 없었으니 선화부인 진씨는 참으로 다사다난한 삶을 산 여인이었다.[* 수나라 황실이 [[선비족]] 혈통이며, 아버지의 여자를 아들이 취하는 것은 유목민족의 습성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시각도 있다.] 《수서》에서 부황 시해의 근거로 삼는 사항은 문제가 세상을 떠날 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같은 《수서》임에도 <본기>와 <열전>의 내용이 서로 달라서 어떤 곳에서는 수문제가 죽을 때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마찬가지로 선화부인 진씨에 대한 음행에서도 서로 다른 기술이 존재하기에 양광이 정말로 아버지를 살해했는지는 약간 의문이 있지만 적어도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기는 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이 하루라도 빨리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광은 궁정 반란을 통하여 수나라의 황제가 되었으니 그가 바로 '''수양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