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제(수) (문단 편집) ==== [[대운하]] 건설 ==== 사실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양제는 부임 초기에는 어리석고 우둔한 인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총명한 군주였다. 그는 젊은 시절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진(육조)|진나라]]를 멸망시켰을 정도로 군사적인 능력이 있었으며, 글재주도 있었고, 예술에도 조예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그는 그 좋은 머리로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다채로운 방법으로 부황이 20년 동안 열심히 일구어 놓은 국부를 14년 동안 아주 신나게, 그리고 아주 열심히 털어먹기 시작했다. 양제는 604년에 [[패륜]] 행각을 통해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동시에 [[남북조시대]] 등의 분열기로 인해 남북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게 되었다고 판단해 [[대운하]] 건설을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 도성의 식량 문제도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수나라의 도성 주위가 척박한 땅이라 식량이 부족해서 이를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낙양 등 근처의 강북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충당은 할 수 있었으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식량공급에는 한계가 명확했다고 한다.), 당시 수나라 식량의 주생산지가 강남이라 말과 인부로 운반하기에는 도성까지 거리가 멀어서 효율이 나빠 수로로 운반할 필요가 있었는데 물길이 도성까지 닿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운하 사업 자체는 국가에 필요한 일이긴 했다. 다만, 백성의 먹고 사는 문제에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기간을 넉넉하게 잡고 노역에 참여시킬 인원을 적당히 조정해야 했는데 결과만 좋으면 된다며 백성들을 갈아넣은 것이 문제였다.] 대운하는 사실 부황 문제때부터 시작되었으나 국고의 손실을 염려해 중단했었다. 결국 대운하의 스케일이 커진 것은 양제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할 때, 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행궁]]을 지었으며,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서 그 옆에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대운하 건설에 동원된 연인원만 자그마치 1억 5,000만명이었고[* 당시 전세계의 인구수가 2억 5,0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유럽]] 대륙 전체의 인구가 1억도 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과장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만큼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운하에서 얕은 지대가 발견되자, 양제는 관리 책임자와 인부 50,000명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시기를 다룬 작품들에서는 '주왕의 재림',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다'면서 수양제의 악랄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중국에서 발행된 《만리중국사》라는 전연령판 역사만화에서는 '백성의 먹고 사는 문제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끝내려면 10년이 넘게 걸리는데 황제께서는 이걸 6년 안에 끝내라고 한다'며 관리가 푸념하다가 여성들까지 끌고 가서 운하를 파는 일에 참여시키는 걸로 나온다. 운하가 완성된 후, 보다 못한 신하 한 명이 수양제에게 '운하 사업은 나라의 장래에 도움이 되는 일인 건 맞지만 폐하께서는 너무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하십니다. 통제거 옆에서 죽은 사람만 250만 명이 넘으며, 운하로 양측에 쌓인 유골은 아직 다 치우지도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너무 많은 백성이 노역에 끌려간지라 농사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데 흉년까지 겹쳐서 백성들은 굶어죽을 지경입니다'고 간언하자 '에잇! 저놈 때문에 입맛이 떨어졌잖아! 여봐라, 이놈을 끌고 가서 매질해 죽여라!' 하고 반응한다. 당시 강남 지역은 한나라 이후 개발이 전혀 안된 습한 지역이었는데, 이러한 지역에서 백성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부려먹었냐면, 물속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물 밖으로 나와 몸을 말릴 시간이 없었던 터라 '''발의 살이 썩어 [[구더기]]와 모기 유충들이 들끓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