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주십일 (문단 편집) == 내용 == 열흘에 걸쳐 학살된 사람은 무려 '''80만 명'''에 육박한다. 당시 황도 북경성에 이은 제2~제3의 대도시였던 양주성의 인구를 약 80~100만 정도로 추측하고 있는데, 대략 '''도시 인구의 80% 이상'''이 깡그리 몰살당한 처참한 대학살극이었다. 근대에 일본군에 의해 일어난 [[난징 대학살]]도 15~30만의 희생자로 추론되는 판국인데 전근대에 일어난 학살이 후대에 일어난 학살의 규모를 3배 이상 초월하고 있다. 양주십일기는 이 학살의 현장을 그림을 그리듯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청군이 대로를 휩쓸고 다니면서 아이를 가진 여자들을 납치하는 과정에 대로변 흙탕물에 버려진 수백구의 갓난아이들의 시체들, 성 안과 밖에 성높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쌓인 산처럼 많은 시체들과 시체들에서 흘러나와 세개의 하천줄기를 형성해 온 도시를 휘감은 핏물…저자의 가족들 역시 참화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학살 도중 큰 형·작은 형과 형수·조카를 잃어버렸고, 저자와 아내·자식까지 3명만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이때 너무 많은 주민들이 죽어서 그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마치 호수와 같았고, 그 위에 성의 현판이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묘사는 중국의 소설가인 얼웨허가 발표한 소설 <강희대제> 5권의 끝부분에서도 언급되면서 "어떻게 짐승 같은 만주족과 함께 할 수 있느냐?"라는 문구로 표현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