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파(가수) (문단 편집) === 1996 ~ 2001년 === 서울 [[중경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6년 12월 말 정규 1집 '[[Yangpa]]'로 데뷔했다. 해를 넘긴 1997년 그해 봄은 데뷔 후 곧바로 찾아온 그녀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타이틀 곡인 '애송이의 사랑'은 1997년 3월 8일 공중파 첫 1위를 시작으로 3-4월에 [[KBS 2TV]] <[[가요톱10]]>에서 최연소 골든컵[* 5주 연속 1위] 수상자의 영예를 안겨 주었으며, [[MBC]] <[[인기가요 BEST 50]]>[* 3주 연속 1위 - Best of Best] , [[SBS]] <[[SBS 인기가요|TV 가요 20]]>[* 4주 연속 1위]에서도 1위를 연달아 차지하며 the best of best, 왕중왕 등을 차지하며 더 이상 1위를 할 수 없을때가 되어 챠트에서 내려 올때까지 도합 12주 연속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 여성 솔로 가수의 마지막 골든컵 수상곡이며 후속곡으로 선보인 '천사의 시'도 가요톱텐에서 최고 4위까지 랭크되면서 큰 인기를 누렸다.] [[https://youtu.be/yjcJA80jpGg|▶ KBS 가요톱10 골든컵 <97.04.16>]] / [[https://youtu.be/yAq-OM8Jdko?t=2680|▶ MBC 인기가요 베스트50 Best of Best <97.03.22>]] 이 음반은 양파의 앨범 중 가장 많은 82만 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렸고[* 당시 신촌뮤직은 음반판매샵까지 운영했는데, 뒤로는 100만장이 넘는 규모의 판매량을 올렸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 해 모든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스포츠서울 제8회 서울가요대상 신인상, SKC 제12회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신인상, KMTV 가요대전 인기가수상 & 최우수 신인가수상, SBS 가요대전 신인상, KBS 가요대상 신인상 ] 한마디로 혜성같이 등장해 데뷔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얻은 흔치 않은 여가수가 됐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R&B]]와 [[힙합]] 등 [[흑인]] 음악이 우리나라에 막 소개되던 시기였다. 솔리드의 [[김조한]]을 통해서 최초로 가요계에 R&B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여자 가수는 아직까지 나타나질 않았다. [[한영애]], [[박미경]]이 흑인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은 창법을 구사했지만 한영애는 [[소울 음악]], 박미경은 유로 댄스와 발라드 음악을 다루었기에 R&B와는 거리가 있었다. 'R&B 남자 가수가 있으니 이제 여자도 R&B를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대중들의 기대가 있었고, 때마침 그 틈새를 양파라는 어린 고등학생 소녀 가수가 파고든 것이다. 양파 역시도 정통 R&B 와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자유자재로 기교를 부리고 극적인 완급조절을 하는 모습이 기존 가수들에게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고, R&B 가수들이 흔히 쓰는 방식이라 대중들에게 '저게 진짜 R&B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앨범 프로듀싱부터 작곡가, 세션 등 전부 미국인들 (MI 출신의 음악가들과 소니 산하의 프로 작곡진들) 로 구성되었고, 가사만 한국 제작진이 참여, 미국에서 체류하며 노래 녹음까지 했으니 당시 가요와는 다른 본토 팝 음반에 가까웠다. 실제로 영어가사로만 된 곡이 2곡이었고, 영어를 잘하는데다 한국어로 노래할 때엔 간드러지는 한국적 정서까지 표현해내며 대중들의 귀를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생이라기에는 성숙된 곡 해석능력과 재능면으로는 신동소리를 들었으며, 대중적으로 현재까지도 R&B 여자 가수들 중 최고의 임팩트를 기록한 노래가 바로 '애송이의 사랑' 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1년 뒤에 등장한 여고생 아이돌 [[S.E.S.]] 가 유사한 방식으로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이 후로도 [[진주(가수)|진주]], [[박정현]], [[박화요비]], [[애즈원]], [[J.ae|J]], [[박기영]], [[유미(가수)|유미]], [[린(가수)|린]], [[거미(가수)|거미]], [[빅마마]], [[버블시스터즈]], [[가비엔제이]], [[씨야]], [[다비치]], [[에일리]] 등 수많은 R&B 기반 여가수들의 등장에 시초라 할 수 있다. 이들 중 분명히 양파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가수도 있고 양파 이상으로 스테디셀러로 남긴 노래도 있겠지만 신드롬 급의 대중적인 폭발력 면으로 '애송이의 사랑'을 넘는 노래는 아직까지 나오지 못하고 있다. 당장 지금도 50만장 이상, 거의 100만장 가까이 기록한 앨범이 양파 1집 말고는 없다. 게다가 '애송이의 사랑'이란 곡은 당시 [[월트 디즈니 컴퍼니|디즈니]] OST를 작업하던 미국 SONY 산하의 작곡가 Mike Taplinger(마이크 태플링거)의 작품으로 당시 발라드와는 색깔이 많이 다른 본토 팝이었기에 음악인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수작이라 평가받으며 신드롬에 더욱 일조했다 보인다. [* 양파 1집은 미국에서 전 곡 외국 작곡진들과 작업을 한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해외 작곡진들의 곡에 한국말 가사를 결합하는 지금의 SM ent. 의 제작 방식을 양파가 처음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이들 중 '애송이의 사랑'과 비견될 만한 앨범은 [[빅마마(가수)|빅마마]] 1집이 있지만 이 경우는 꾸준히 사랑받은 경우이고 양파처럼 단기간에 스타가 되어 대중들에게 충격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한가지 더라면 1990년대 후반, 이제 막 [[아이돌]]의 개념이 생기고 있던 시절 10대답지 않은 가창력을 가지고 있었고, 진짜 아이돌로 취급받지는 않았지만 10대 가수였기에 청순 컨셉 아이돌처럼 풋풋한 이미지를 가지면서도 가창력에서 더욱 뛰어났기에 주목받을 수 있었다. 노래가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했던 것도 한 몫했지만 덤으로 당시 학교에서 전교권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엄친딸' 이미지를 가진 최초의 가수로 큰 인기를 누리면서 전성기를 이어 나갔는데, 1997년 11월에 1집 활동 후 당시 수능을 치던 도중 언어 영역이 끝난 후 장유착과 급성맹장염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남은 시험을 치르지 못해 본인이 원하는 대학을 못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 이게 글이어서 맘에 와닿지 않는 거지, 실제로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상황이다. 당신이 12년 동안 노력해서 맺은 결실이 불합격이란 결과로 갑자기 모두 증발해 버린다 생각해 보라!! ] 고2 겨울방학에 데뷔를 하는 바람에 고3 수험생 시절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1집 활동으로 떨어졌던 성적이 다시 올라 신문을 통해 공개된 마지막 모의고사 점수로는 [[연세대학교|연대]] [[정치외교학과|정외과]]를 지망한다고 방송에서 얘기했었다. 당시에 양파의 모의고사 점수는 어떻게든 유출이 돼서 스트레스가 심한 나머지 이름을 이은집으로 마킹하기도 했는데, 그 사실조차도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시달렸다고 한다. 수능 당일, 양파와 같은 수능장에 있었던 수험생들 역시 학교 앞을 지나치게 점령해있던 공중파, 케이블 등의 방송매체들과 경호원들 또 응급실 후송 소동 때문에 영향을 받아 제대로 시험을 보지 못했고, 이 때문에 대중의 원성을 사 '원래 공부를 못했는데 실력이 들통날까봐 아픈 척 연기한 것 아니냐' 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의 인기는 10대 청소년층의 지지가 절대적이었기에 이 사건으로 이미지 실추를 염려한 소속사에서는 발빠르게 준비한 2집을 출시하기로 한다. 그러한 악재 속에도 97년 연말 마무리는 성대하게 하게 된다. 제 8회 스포츠 서울 서울 가요 대상 신인상, 제 12회 대한민국 영상음반 대상 신인상, KMTV 가요대전 최우수 신인가수상, KBS, SBS, MBC 가요대전 신인상 수상 등 그 해 전 어워드 신인상을 석권한다. 1998년 1월에 정규 2집 '[[Neverland]]' 를 발매하고 '알고 싶어요!'라는 곡으로 활동했을 때는 수능이 불과 두 달 밖에 지나지 않았었다. 앨범이 나온 게 그 당시 쓰러져 실려 갔을 때 몰래 앨범을 준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는데, 양파는 맹장수술 후 회복기를 가지고 싶었으나 본인 의사와는 다르게 회사의 종용으로 녹음에 임해야 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수능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성급하게 활동을 한 탓인지 1집의 폭발적인 인기에 못 미치며 [[소포모어 징크스]]에 빠졌다. 물론 [[국제통화기금|IMF]]로 타격을 받아 음반 판매량도 거의 절반 가까이 감소했지만, 그마저도 여가수 총 판매량 탑에 드는 수준이었다. 사실 1집이 워낙 큰 인기를 끈 것이지 2집이 인기가 없었다는 소리는 아니며 2집도 최고 4위까지 랭크되면서 인기를 이어갔고, 이렇다 할 경쟁자가 등장하지 않아 한국 최고의 R&B 여가수라는 수식어를 그대로 이어가며 98년 5월에서 6월까지 첫 전국투어 단독 콘서트를 성공리에 마치게 된다. 2집 활동 후 학업을 중시하던 양파는 수능 사건이후 [[이적]], [[김동률]] 등 음악선배들의 조언으로 국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유학을 결심한다. 당시 대중들은 모범생이었던 양파의 재수에 관심이 많았는데, 98년 7월 [[버클리 음악대학]]에 입학허가를 받고 장학금 오디션에 합격해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뜬 후 많은 또래 팬들의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https://sports.chosun.com/news/news_o3.htm?name=/news/old/199902/19990222s064|★ 기사 참고]] 1999년 6월 말, 지금껏 양파 본인이나 팬들이 꼽는 최고의 명반인 3집 '[[A`ddio|개구리 연못 속의.. 날다]]' 로 컴백했다. 타이틀곡은 슬픈 발라드곡 'A`ddio'. 한 여름에 이례적이게 마이너 발라드로 컴백했으며 장르나 깊이 면으로 넓어진 음악적 스펙트럼과 가창력 또한 업그레이드 된 모습을 보여주며 발표 후 [[신나라레코드]] 가요 판매 집계에서 6주 연속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음악 프로그램에서도 1위를 하는 등 최종 판매량은 68만장 정도로 앨범 판매량과 노래 인기로는 1집 다음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연달아 '애이불비', '그녀 안의 나', 'missing you' 등 수록곡들이 꾸준히 사랑받으며 인기를 회복하고 더 이상 아이돌 이미지의 학생 가수가 아닌 뮤지션으로 인정받으며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음악적 기반을 탄탄히 다졌던 시기였다. 이 때부터 양파의 [[프로듀서|프로듀싱]] 능력이 적극 발휘되는데, 2집에서는 영어 나레이션 작사 정도로만 참여하던 수준에서 3집에선 공동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리고, [[신재홍]], 심상원, [[김현철(가수)|김현철]], [[조규찬]], [[조규만(가수)|조규만]] 등 참여 뮤지션을 직접 컨텍하고, 당시 본인이 즐겨 읽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에서 인용한 앨범 제목을 짓는 다던지,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이라는 [[아르튀르 랭보|랭보]]의 시 제목을 비튼 '지구에서 보낸 한 철'이란 다소 독특한 자작곡을 수록하는 가 하면 '나쁜 혈통', '나비의 비행', '애이불비' 등 당시 아이돌 음악 세계관과는 다른 정서의 독특한 제목들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들 모두 양파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그녀는 'A`ddio' 활동을 마치고 [[미국]] [[보스턴]]의 명문 [[버클리 음악대학]]에 전액장학생으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6월부터 9월 초 입학 전까지 꽉찬 활동을 하고 진짜 노래 제목처럼 홀연히 '''떠났다.''' [* 'A`ddio'는 [[이탈리아]]어로 '안녕'이라는 뜻으로 헤어질 때 쓰는 말이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이승기]]가 리메이크를 하기도 했다.]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 처음 그녀를 데뷔시킨 이흥우 피디가 제작하던 연예 소식 전문 프로그램에 유학생활을 영상으로 전하며 대중들과 꾸준히 소통하기도 했고, 99년 12월 겨울방학 중에 팬들 사이에서 최애 명곡으로 평가받는 '다 알아요'를 타이틀로 건 베스트 앨범을 발매했다. 특히 이 곡의 뮤직비디오에 담긴 양파의 [[보스턴]] 유학시절 모습으로 팬들은 한국 활동 없는 허기를 달래야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TDDWUpF1ITo)]}}} || || [MV] 양파 - 다 알아요 || 2000년 3월 봄 방학, 미국 [[소니|SONY]] 산하의 '마이시스린' 이라는 기획사에서 미국 진출 앨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97년 [[베이비페이스]] 내한 당시 라디오 생방을 위해 MBC본관 엘레베이터를 같이 타면서 우연히 만나게 된 인연은 유명한데, 양파가 그를 먼저 알아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팬이라고 말을 건냈고, 당시 [[베이비페이스]]의 한국 [[프로모션]]을 담당하던 [[워너 브라더스]]를 통해 [[베이비페이스]]가 양파의 자료를 요청해 만남이 성사되었다. 그런 발단으로 LA 에서 미국 진출을 목표로 작업을 하던 양파는 그 해 가을 기획사의 부도로 결국 준비했던 음반을 내보지도 못하고 접어야 하는 일을 겪게 된다. 2000년 5월 버클리 휴학 후 미국에 체류하던 중 , 8월 24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LA 다저스]] [[다저 스타디움|스타디움]]에 초청되어 [[박찬호]] 선발 등판 전 [[The Star-Spangled Banner|미국 국가]]와 [[O Canada|캐나다 국가]]를 불렀다. [* [[파일:양파박찬호.jpg|width=30%]] ] [* 양파는 2015년에 추신수 선수 등판때에도 [[애국가]]와 [[The Star-Spangled Banner|미국 국가]]를 부른 바 있다. ] 2000년 9월 양파는 서울 쌈지 스페이스에서 열린 <불구속 입건 퍼포먼스 프로젝트> 에 작가로 나서 비디오 아트를 출품하며 '창작의 자유에 대한 침해' 를 풍자, 직접 연기까지 하며 새로운 영역으로 발을 넓혔는데, 평소 찐팬들 사이에는 양파의 예술적 관심사가 다양한 것이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2000년 12월 31일 일본 NHK 한일문화교류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데뷔 초부터 [[우타다 히카루]]와 비교되면서 일본 팬들도 생겼고 일본 음반 업계의 러브콜이 있었지만, 아직 학생신분이어서 자유로이 일본을 다닐 수 없는 상황인데다 당시는 시기가 SM ent가 보아를 일본에 진출시키는 시기보다도 빨라 신촌뮤직으로선 일본 활동을 적극적으로 성사시키진 못했던 것 같다. [* [[파일:우타다히카루_양파.jpg|width=40%]] ] 2001년 4집 '[[Perfume(앨범)|Perfume]]' 을 가지고 국내 음악계로 다시 컴백한 그녀는 직접 작사한 타이틀 곡 'Special Night' 으로 공중파 순위프로그램을 시작으로 활동을 이어나간다. 점점 성장해가는 양파만의 색깔이 가장 뚜렷해진 앨범이라고 평가받는 4집은 프로듀싱뿐만 아니라, 자작곡 3곡에 작사만 7곡을 하면서 안정된 모습을 보여줬다. 유학 중이었기에 활발한 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발매와 동시에 무난히 챠트 10위권에 안착했고 4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며 유학 후 인기가 예전만 못하단 우려가 기우에 불과하단 것을 증명했다. 그 해 5월 평소 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아 [[지미 카터]] 대통령, 사랑의 집짓기 (Habitat for Humanity) 자선기금마련 행사에 참여, 직접 집을 짓기도 했다. 유학 도중에 발매된 당시 절친이던 [[김동률]]의 정규 2집 '[[希望]]'의 수록곡 "벽"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바 있다. [* 김동률의 요청으로 이 곡을 녹음하러 [[신해철]]이 머물던 뉴저지에 갔을 때 [[신해철]]을 처음 만났고, 그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을 2015 <[[나는 가수다 3]]> 에서 회고하며 故[[신해철]]의 명곡 '[[민물장어의 꿈]]' 을 선곡해 부르기도 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