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트레아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에티오피아의 역사)] 에리트레아는 4세기에서 6세기 동안 번영한 고대 [[악숨 왕국]]의 주요 항구가 있던 지역이다. 950년경에 에리트레아는 초기 [[에티오피아 제국]]과 연합을 이룬 자치국이었다가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에 에리트레아의 통치권을 놓고서 [[에티오피아 제국]], [[오스만 제국]], [[티그라이]] 왕국, [[이집트]], [[이탈리아]] 사이에 각축전이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1890년에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당시 수도 [[아스마라]] 주민의 절반이 이탈리아인이었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기지로 사용되었던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6개 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가, 1941년부터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ritrean_Independence_War.gif|width=501]]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그러다가 에리트레아는 1952년경에 [[에티오피아 제국]]의 1개 주로 [[병합]]되었다. 1962년 11월 14일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를 합병하자 [[이슬람]] 중심의 에리트레아 해방전선(ELF)과 기독교도 중심의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 Eritrean People's Liberation Front) 등은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ELF의 조직원들이 1977∼1978년, 1985년에 대거 에리트레아 해방전선-인민해방군(ELF-PLF)이나 EPLF에 합류함으로써 ELF의 군사조직은 와해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에는 ELF-PLF도 EPLF로 거의 흡수되었다. 한편 이들 분리주의 저항 단체들은 [[수단 공화국|수단]]과 [[중국]], [[소말리아]],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튀니지]], [[리비아]] 등 각국의 군사,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에티오피아군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 [[파일:Eritrean War of Independence.jpg|width=801]] || || [[1980년]] [[AKM]] 소총과 [[56식 자동소총|56식 소총]]을 들고 에티오피아군과 교전하는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 게릴라 병사들 || 1974년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폐위와 1991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멩기스투 정권]]이 붕괴되고, 에티오피아 반란 연합세력이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는 등의 혼란을 틈타 EPLF는 1991년 5월 수도 [[아스마라]]를 탈환한 뒤 에리트레아 독립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1993년 5월 24일 독립을 선포하였다. 4년 이내에 새 헌법을 제정해야 하는 국회는 1993년 6월 초대 대통령으로 EPLF의 사무총장인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를 선출했다. EPLF는 1994년 유일 합법정당인 [[민주정의인민전선]](PFDJ, People's Front for Democracy and Justice)으로 개편되었다. 에리트레아가 독립하면서 에티오피아는 [[내륙국]]이 되었고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항구 사용을 두고 갈등을 겪었다. 결국 항구 이용 문제와 바드메 소유권을 두고 에티오피아와 [[1998년]]~[[2000년]]까지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지도 하에 본격적인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에서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선전했지만 결국 스케일에서 밀려 전쟁 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에서 전쟁을 끝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에리트레아와 완전히 적대관계가 된 에티오피아는 2000년대에서 2010년대 초중반까지 바다를 접한 다른 아프리카 이웃국가들인 [[지부티]]와 [[케냐]]로부터 항구를 빌려 쓰고 있었다가 2018년 평화조약을 맺고 바드메를 돌려주는 대신 마사와, 아사브 등 에리트레아 항구에 대한 사용권을 에리트레아 정부로부터 다시 허용 받았으며,[* 물론 에티오피아와의 전쟁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에리트레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전쟁을 일으킨 에티오피아에게 자국 항구를 빌려줄 수 없다며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양국의 관계는 많이 호전되었다. 다만 에티오피아와 전쟁을 치른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에리트레아 국민들의 에티오피아에 대한 감정은 한국과 일본, 영국과 프랑스처럼 국민감정 상 좋지 않은 편이다. 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이스라엘]]과 [[미국]],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에게 밀리면서 안 그래도 열세였던 [[공군]] [[전투기]] 다수를 상실하면서 패색이 짙었으나, 반대로 [[우크라이나]]와 [[리비아]]의 지지 및 에티오피아 내부 여론의 반발을 잘 활용하여[* 1990년대 말 이 전쟁을 다룬 국내 언론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내부에서는 "국민들은 굶어 죽는데 경제나 살릴 것이지 무슨 전쟁이냐" 며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외교적으로 영토를 잃지 않고 유엔의 중재로 2000년 12월 종전하였다. 이후 유엔 평화유지군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국경지대에 폭 25km의 임시안전지대(TSZ)를 설치하고 양측을 감시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이 벌어진 이후 2003년 3월 국경위원회(EEBC, Eritrea-Ethiopia Boundary Commission)가 양국간 국경의 소도시인 바드메(Badme)를 에리트레아 영토라고 결정하자, 에티오피아는 수용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양국간 국경 획정 작업이 중단되었으며, 양국 간의 대화는 끝나고 말았다. 2005년 10월에도 국경에 분쟁이 해결되지 않고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에티오피아는 TSZ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의 공중 정찰을 금지시켰고 또다시 국경지역에는 군사적 긴장 상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군사적 긴장 상태로 인해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으로 재정 수입은 감소하고 군사비 지출이 급증하여 오랜시간 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게 되었으며, 10만 명에 달하는 [[수단 공화국]] 국경지대의 난민과 7만 5천 명의 에티오피아 추방 난민은 에리트레아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2004년 4월에 에리트레아 내에서의 인권 상황이 악화되었고, 다당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성장촉진법(AGOA, Africa Growth Opportunity Act) 수혜 대상국에서 에리트레아를 제외시켰고 현재까지도 에리트레아인들은 하루하루를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은 아프리카 각국의 분쟁에까지 개입해 테러단체와 반군 세력들까지 지원을 하는데, 실제로 소말리아에서 [[알 샤바브]] 연계 테러를 지원한 혐의로 UN에서 에리트레아에 대해 제재를 가하고 있다. 2018년 9월 30일에 에리트레아는 유엔 제재를 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001&aid=0010370427|#]] 2023년 2월 10일에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에리트레아 대통령은 [[티그라이 전쟁]] 당시에 에리트레아군이 약탈, 강간, 학살 등의 인권 침해를 저지르거나 본인이 티그라이 전쟁에 개입했다는 보도를 전부 '에티오피아의 평화 과정을 방해하려는 허위 정보 캠페인'이라고 일축했다. [[https://www.aa.com.tr/en/africa/eritrean-leader-denies-rights-violations-by-his-forces-in-ethiopian-war/281475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