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엠버밍 (문단 편집) == 역사 == 유래는 [[고대 이집트]]의 [[이집트/미라|미라]] 제조 기술이다. 6-7세기를 무대로 한 [[아라비안나이트]]의 한 에피소드에도 죽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미녀의 시신이 [[수은]] 등을 쓴 보존 기술로 마치 살아 있는 듯 보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보존 기술이 유럽으로도 전파되었고 이후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 이후로 왕실 장례법에서 이런 미이라 제조술을 응용하여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그 예로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제나 황실 인물이 죽으면 내장과 심장을 적출하여 따로 성당들에 보관하고 시신은 약품에 절여 간단한 방부 처리를 한 후 3중~4중으로 구성된 관에 봉하여 카푸친 성당의 황실 묘역에 안장하였다. 귀족 또는 저명인사들의 장례를 치를 때도 장기를 적출하고 시신을 방부액에 절여 관에 봉안하는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그 예로 [[올리버 크롬웰]]은 장례 때 방부 처리가 상당히 잘 되어 있었는데 이후 [[찰스 2세]]에 의해 [[부관참시|관이 파내어지고 효수를 당할 때]] 도끼로 30번이나 내려쳐서 목을 겨우 잘라냈을 정도로 시신이 잘 절여져 있었다. 아시아도 마찬가지인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중국)|전국시대]]에도 [[수은]]을 써 시체를 상하지 않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굴묘편시]]에 나오듯이 [[오자서]]가 [[초평왕]] 시체를 [[구리]] [[채찍]]으로 수백여대를 패면서 죽은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갚을때 십팔사략에선 초평왕 시체가 수은을 듬뿍 칠해 손상이 적어서 오자서는 기뻐하면서 두 눈을 후벼파고 온 몸을 [[토막]]내며 채찍질을 가했다고 나온다. 이후 [[서부개척시대]]에 이르러 엠버밍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다시 한 번 발전하게 된다. 당시 [[미국]]은 광활한 미개척지에서 개척이나 모험에 종사하다 객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데다 아직 교통 요건도 미비했기 때문에 고향으로 운반할 때까지 시신의 장기간 보존이 절실했으며 미국 초기의 잦은 [[전쟁]]으로 인해 전상(戰傷)으로 훼손된 시신이 많이 생겨나자 시신의 복원과 보존, 그리고 부패로 인한 질병 발생의 방지를 목적으로 적용되어 점차 민간에 퍼져나갔다. 초기에는 일정한 기준이 마련되지 않아 [[장의사]]들이 개별적으로 고안해낸 방부액 등을 사용하여 간혹 난잡하게 처리되는 일도 많았으며 이러한 사례가 몇 건 폭로되자 결국 미국에서 시신위생처리사와 장의사들의 자격을 위한 규칙과 법령을 만들게 되었다. 이후 대중에게 엠버밍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하여 민간에서의 수요도 급증하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장의사들이 '''손님 유치'''를 목적으로 신기술 개발에 열을 올린 결과 엠버밍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엠버밍 관련 전문가를 양성하는 기관도 각지에서 생겨나 그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