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몽전쟁 (문단 편집) ==== 제8차 침략 ==== * '''일시: 1257년 5월 ~ 1257년 10월''' * 요약: 몽골군의 강화도 상륙 시도를 격퇴했다. [[1257년]](고종 44년), 고려에서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중단하자 분노한 몽골이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했다. 그 사이 [[최항]]이 죽고, [[최의]]가 집권한 지 1개월도 되지 않은 1257년 5월이었다. 그간 고려 조정은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의 허락을 얻었는데 몽케 칸은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했다. 1257년 10월에 몽골군은 '선철군 후입조'의 설득에 따라 철수했다.[* 고종이 연로하여 목표는 고려 태자의 입조로 낮춰졌다.] 하지만 최의는 그 다음해 [[김준(고려)|김준]] 일파에게 살해당했다.('''무오정변''') * 전투(2승 3패) * 1257년 4월 9일 [[동하|동진]](東眞)이 동주(東州) 지역을 침략했다. 5월 4일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보고하기를, “분사어사(分司御史) 안희(安禧)가 영풍(永豊)의 산골짜기에 군사를 매복하여 두었다가 동진(東眞) 군사를 협공하여 무기(兵仗)와 안장 얹은 말(鞍馬), 포로로 잡혔던 남녀 및 소와 말 등의 물건을 되찾았습니다.”라고 했다. <승> * 몽골군이 태주(泰州)에 들어와 부사(副使) 최제(崔濟)를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아 갔으며, 태주 사람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을축 서북면(西北面)에서 급하게 보고하기를, “몽골 기병 30여 명이 청천강(淸川江)을 건너 용강(龍岡)과 함종(咸從)으로 향했습니다.”라고 했다.(1257년 5월 11일) <패> *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보고하기를, “동진(東眞)의 기병 3,000여 명이 등주(登州)에 침입했습니다.”라고 했다.(1257년 5월 13일) <패> * 신위도: 몽골군이 맹주수 호수를 살해했다. 아내 유씨(兪氏)는 더럽힘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자결했다.(1257년 7월) <패> * 창린도(昌麟島): 옹진(甕津)현령 이수송(李壽松)이 별초를 거느리고 쳐서 물리쳤다. 수송에게 칠품을 가자(加資)했다. 출처 : 《고려사절요》 권15 고종 안효대왕(1257년 9월 18일) <승>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