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몽전쟁 (문단 편집) === 대몽골 강화와 개경 환도, [[삼별초의 난]] === 그러던 [[1259년]] 8월, 몽골의 [[몽케 칸]]이 붕어하고, 몽케의 동생들인 [[쿠빌라이 칸|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형제 사이에서 칸위 계승 전쟁('''툴루이 내전''')이 벌어질 시점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몽골로 향하던 고려의 태자 왕전이 이후 새롭게 제5대 대칸이 될 쿠빌라이를 만나 강화(講和)를 논의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귀국한 태자는 7월에 승하한 [[고종(고려)|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원종(고려)|원종]](元宗)이 되었다. 기나긴 전쟁이 끝났지만 고려 조정의 의견 불일치로 개경 환도(還都)만큼은 계속 지연되었다. 원종은 몽골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어 복속을 거듭 표시했으나,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권자가 된 [[김준(고려)|김준]]의 반대로 강화도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심지어 1268년 김준을 살해하고('''무진정변''') 새 집권자가 된 [[임연]]은 1269년 6월 강화를 반대하여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왕창을 임시로 즉위시키니 이 사람이 [[영종(고려)|영종]][* 훗날의 시호]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몽골의 압력으로 11월에 물러났고, 임연 역시 몽골의 재침공을 두려워하다가 등창으로 죽었다. [[임유무]] 역시 출륙을 반대했지만 몽골의 군사적인 뒷받침을 받은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경오정변''') '''12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100년 만에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강화를 맺은 지 10년 만에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후 [[배중손]]과 [[김통정]] 등 일부의 무신들이 환도에 극렬히 반대하며 '''[[삼별초의 난]]'''을 일으켰으나 여몽연합군에 의해 1271년 진도에서 배중손이 전사하고, 1273년 제주도에서 [[김통정]]이 살해된 후, 삼별초가 전멸당하면서 끝이 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