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몽전쟁 (문단 편집) === 제1차 침략 === [youtube(cOyE7QoMo5o)]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cgsociety.org/199463_1358905891_large.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bbggnews.com/1_L_1347593397.jpg|width=100%]]}}} || ||<-2> 몽골군 {{{-2 (※ 출처 : [[일러스트레이터]] [[http://blog.naver.com/dnjscjf1717|불나방 블로그]])}}} || * '''일시: 1231년 음력 8월 ~ 1232년 음력 3월''' * 요약: 수도 개경이 포위되어 인질 및 공물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귀주성, 자모산성, 충주성 전투에서의 승리로 혹독한 조건은 면했다. 제2대 태종 [[오고타이 칸]]은 숙적인 금나라를 치기 위해 배후의 위협을 미리 차단하기를 원했고[* [[일본을 공격한다]]급의 뜬금없는 공격은 아니었다. 금나라는 거의 형식상 수준이긴 했지만, 어찌됐든 고려의 상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권황제였던 [[살리타이]](撒禮塔)에게 군사 30,000명을 주어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군은 음력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군|의주]]·[[철주성 전투|철주]] 등을 단숨에 함락시키며 남하했고, 고려군은 이에 맞서 '''[[자모산성 전투]]'''와 '''[[동선역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안북성 전투]]'''에서 희대의 패착을 거두며 전황이 급속도로 불리해졌다. '''[[귀주성 전투]]'''에서의 혈전 속에 그 지역을 수비하던 [[박서]]와 [[김경손]] 등의 맹활약으로 10,000명의 몽골 북로군을 귀주에 묶어두며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황에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몽골군이 수도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할 수 없이 살리타이가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만났다. 그 후 왕족인 회안군 왕정을 적진에 보내어(사실상 인질) 강화를 맺었고, 제1차 침입은 종료되었다. 이때 좀 어이없는 사건도 하나 있었다. '''충주성 전투'''에서 성을 수비하던 관리들이 도주하자 양민과 노비들이 남아서 성을 지켰는데, 문제는 몽골군이 철수한 후 돌아온 관리들이 성안의 재물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백성들을 처벌한 것이다. 때문에 일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몽골군 격퇴의 공을 높이 평가한 고려 조정은 반란을 용서했다. * 전투(4승 3패) * 함신진 전투(1231년 8월 초순) <패> * [[철주성 전투]](1231년 8월 중순 ~ 8월 29일) <패> * [[귀주성 전투]](1231년 9월 4일 ~ 1232년 1월) <승> * [[동선역 전투]](1231년 9월 13일 ~ 9월 14일) <승> * [[안북성 전투]](1231년 10월 20일) <패> * [[제1차 자모산성 전투]](1231년 11월 ~ 12월) <승> * 충주성 전투(1231년 12월) <승>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