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불위 (문단 편집) == 평가 == '''그저 맨 손에 아무 것도 없었던 떨거지 왕족을 일국의 왕으로 만들고, 자신도 일개 상인에서 한 나라의 실세를 거머쥔 정치 거물로 성장했다'''는 점을 보면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주를 농락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하루 아침에 모든 권력과 명성을 잃고 추락한 끝에 자결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인격적으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예컨데 [[사마천]]은 《[[사기(역사책)|사기]]》<여불위 열전>에 여불위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의 허무한 몰락을 논하며 '''"소위 이름만 알려진 자(所謂聞者)"'''라 평하였다. 이는 그 대단한 명성과 지위와는 대조적으로 그 행동은 올바르지 못 한 간사한 자라는 말 정도로 해석된다. 다만, 이렇게 사후의 평이 박했던 것에 비해 생전의 평판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불위 자신이 권력을 손에 쥔 이후로도 학자나 [[선비]], [[도인]] 등을 후원해주며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는 꽤나 존경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여불위가 무려 진시황을 능멸하는 대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석학들과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여불위를 변호한 덕분에 일단은 관직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여불위가 당대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전국사군자]]를 따라하면서 많은 [[식객#s-2]]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식객들과 자신의 부를 통해 만든 것이 바로 《[[여씨춘추]]》라는 책으로 여불위가 이 책을 만든 뒤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빼는 자에게는 1,000금을 주겠다고 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여불위 본인의 능력과 별개로 이렇게 많은 이들의 변호를 받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데, 당장 영이인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화양부인을 구워삶고, 이인에게 조나라의 명사들을 섭외하라고 조언한게 여불위이다. 즉,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방법과 인맥의 힘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었던 것.''' 당연히 재상 시절에도 이런 인맥 관리를 철저히 했을테니 그에게 신세를 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변호했을 것이다. 사실 말이 상인이지 저 정도 규모의 상인이면 요즘으로 치면 [[재벌]]급 거물 사업가인데, 오늘날 한국에서도 재벌 회장이 횡령이나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 친(親) 재벌 성향의 언론과 학자들이 나서서 경제 위기나 취업난을 거론하며 회장님을 석방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고 이것이 실제 사면이나 가석방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흔하다. 같은 맥락에서 생각하면 될 듯.] 여불위 개인의 능력은 부정할 길이 없다. 여불위가 [[킹메이커]]로 등극하던 시기, 진나라는 [[소양왕]]이 도합 40년에 걸친 [[외척]]인 [[위염(전국시대)|위염]]과 그 세력이었던 [[백기]] 등을 쳐낸 여파로 거의 손에 들어왔던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기해야 하는 등, 확장에 제동이 걸리던 시기였다. 거기에 그 뒤를 이은 [[효문왕]]은 상을 치른 뒤 3일만에 죽음을 맞이했고, 여불위 자신이 왕으로 만들었던 [[장양왕]] 또한 3년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 때 그 뒤를 이은 게 겨우 12살의 진시황인데, 어린 진시황이 성장하여 [[친정#s-2]]을 할 시기가 될 때까지의 '''대략 10년 동안 진나라의 국정을 유지한 게 여불위다.''' 50년 이상 재위했던 왕이 죽음을 맞이하고 그 뒤 왕들이 3일 내지는 3년만에 줄줄이 줄초상을 맞이하는 가운데, '''어린 왕의 섭정이 되어 정부를 혼란없이 장악하고 무난하게 국정을 이끌어갔다는 사실이 이미 재상으로는 합격임을 증명한다.''' 멀리 갈 것 없이 동시기의 바로 옆 [[조(전국시대)|조나라]]가 승상 [[곽개]] 때문에 망했고, 부강했던 진나라 역시 진시황 사후 실권을 잡은 간신 [[조고]] 때문에 불과 4년만에 망해버린걸 보면 여불위의 능력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불위 개인의 정치적인 정략이나 스탠스, 내지는 신묘한 정책 따위가 없었다는 이유로 그의 정치력을 폄훼할 수 없는 이유는 당시 진나라의 상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까놓고 말해서, 진나라의 국책은 [[범수(전국시대)|범수]] 이후 줄곧 범수가 제창한 [[원교근공]]책을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기의 상황에서 '''진나라의 국책을 유지하고 그에 따른 국력 약화 하나없이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던 시점에서 여불위의 능력은 이미 검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그동안 진나라를 유지한 인재들 또한 여불위가 천거한 인원들'''이었으며, 개중에서는 시황제의 치세까지 도움이 된 인물들[* 대표적으로 '''[[이사(전국시대)|이사]].''' 이사는 본디 여불위가 천거한 정치가였다.]도 있었다. 문제는 '''여불위 개인의 능력과는 별개로 상황이 능력 하나 있다고 수습될 정도가 아니었다는 점.''' [[조희(전국시대)|황태후]]가 [[노애]]와 멋대로 놀아나도록 둔 시점에서 여불위의 죽음은 사실상 확정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고, 이를 1년 이상 미룰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여불위의 정치력이 무시할 정도가 못 되었다는 방증이다. 점괘를 조작한 기군망상죄는 물론이요, 왕실의 족보를 꼬이게 한[* 노애가 영정의 [[새아버지]]가 된 꼴이다.] 대죄는 여불위가 얼마나 능력이 있었든, 진나라에 얼마나 공헌했고 몇 명이나 되는 왕을 세웠든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부계 혈통 승계를 중시하고, 행여 시정잡배의 씨가 왕이 될까 두려워 [[고자]]들을 [[환관]]으로 삼던 당대의 기준으로는 대역죄 중의 대역죄를 저지른 것이다. 하물며 그런 비행이 노애의 반란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발각된 것에 더해 '''그 노애를 태후에게 추천한 게 여불위'''였으니 아무리 부왕을 잘 모셨다 해도 죽어 마땅한 것이었다. 귀족이나 왕족도 아닌 일개 상인 출신으로서 뛰어난 국정운영력을 보였지만 황태후와의 치정문제 때문에 결국 몰락하게 되고 평가를 깎아먹게 되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황태후의 치정사건은 진왕 영정의 혈통을 뒤흔드는 중요한 문제였다. '''"조희가 시집 온 후 12개월이 지나 영정을 낳았기에, 생물학적으로 영정은 여불위의 자식이 될 수 없다."'''라는 의견이 있으나, 사실 12개월 이상 임신하다 애를 낳은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며,[* 'Beulah Hunter'라는 사람이 '''375일''' 임신한 공식 기록이 있다 무려 12개월 10일. [[http://content.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797153,00.html|타임지]].] 사실 임신 기간은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왕실에서 이것이 문제가 안 되는 것은 구중궁궐 안에서 고자인 환관들과 궁녀들의 철통감시 속에 있기 때문에 궁에 있는 여성들이 바람을 피우는 것이 차단되기 때문인데, 황태후가 노애와 통정하여 아이까지 낳았고 그 과정에 섭정인 여불위가 적극 개입한 것은 그 믿음을 뿌리채 흔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표현하면 '''"구중궁궐 안에서도 애 낳을 정도로 놀아날 정도로 음탕한데, 심지어 다른 나라에 살던 때라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 아닌가?"'''라는 의심을 할 수 있게 된다. 반론하자면 그건 아무 때에 낳은 아이라면 그렇다는 말이고 영정이 태어났을 때 이미 조희는 영정의 아버지 자초에게 가 있던 상황이었고 당연히 자초는 멀쩡히 살아있었던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아무 근거 없는 소리[* 애시당초 12개월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전에 있었던 초나라의 이화접목 이야기가 진시황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라고 하는데, 이 역시 조희 치정사건과 여불희 문제의 특징과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반론이다. 간단히 말해 진왕 영정(후일의 진시황)의 정통성을 공격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바로 윗 문단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일국의 태후라는 존귀한 신분에 올라서도 외간남자를 궁 안에 불러들여 사통하고 아이까지 낳을 정도인데, 하물며 자초(이인)이 타국(조나라)에 인질로 붙잡혀 있는 당시에 그의 처소에 누가 드나들었을지 어찌 알겠는가?" 라고 '''트집을 잡을 빌미'''가 생겨버렸다는 것이 문제이다. 영정이 태어난 시기가 조희가 자초에게 간 지 열두달이 지난 이후라는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데, 영이인이 여성의 임신기간도 모르는 바보가 아닌 한 만약 조희를 데려온지 아홉달이 되지 않았는데 자식이 태어났다면 당연히 그 아이는 여불위의 아이일 것이므로 태자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열두달만에 태어난 아이이므로 당연히 자기 자식으로 믿고 거리낌없이 태자로 삼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노애 사건이 터짐으로써 "노애를 몰래 태후에게 들여보낸 것처럼, 이전에도 여불위 자신이 몰래 조희와 정을 통했던 것이 아니냐?", 즉 혼인 후 사통을 의심할 빌미가 생긴 것이 문제의 핵심이고, 이것이 진왕으로써 영정의 정통성을 공격할 수 있는 꼬투리가 되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노애를 태후에게 붙여주기 전에도 태후와 여불위가 이미 사통하던 관계였다는 사실은 영정의 정통성을 더욱 흔드는 증거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조금 더 확대해석으로 나아가면, 노애가 자기 아이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 자체도 노애가 진시황을 선왕의 자식이 아닌 여불위의 자식으로 여겼기 때문에, 어차피 현 왕도 왕가의 핏줄이 아닌데 자기 자식이라고 왕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란이라는 대담한 수를 두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절대왕정 국가에서 왕가의 핏줄의 순수성은 왕위계승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그 핏줄에 의심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왕의 권위와 신하들의 충성심이 한꺼번에 흔들릴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다. 이미 즉위 중에도 생부가 여불위 아니냐는 의심을 공공연히 받고 있던 진시황으로서는 노애 사건을 계기로 여불위를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거대한 세력을 지닌 권신을 숙청하여 왕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는 생부이기 때문에 살려주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여불위를 죽여야 했을 것이다. 물론 실리와 일의 성공 가능성을 냉정히 저울질할 줄 알던 여불위가 진짜로 뻐꾸기짓을 하여 진시황의 생부가 되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을 것이고 그건 그 당시 사람들도 알고 있었을 터이나, 뻔한 거짓말도 자꾸 계속 들으면 진실로 믿게 되는게 사람의 심리인지라 진시황은 이런 심리적 이유 때문에 여불위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여불위라는 인물의 캐릭터가 2300년 넘도록 진시황과 얽혀 계속적으로 후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회자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단순히 킹메이커로 성공하여 적당히 권세를 휘두르다가 조용히 말년을 마무리했다면 여불위는 세간에서 그리 대단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허나 진시황이라는 인물을 왕위에 올린 일등 공신이라는 점과 동시에 진시황의 출생에 커다란 의혹을 던져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여불위의 존재는 진시황의 다면적이고 복잡한 캐릭터에 한층 더 흥미와 깊이를 더해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아닐 것임을 알면서도 여불위의 진시황 생부설을 믿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 둘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캐릭터적으로는 확실히 성공한 인생이었음이 틀림없다. 고향이랄 수 있는 동양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좋아봐야 권모술수에 능하고 승부사 기질이 있었던 풍운아, 나쁘면 기만으로 인생을 일관한 사기꾼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의외로 서양 사학계에서 여불위를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지목하고 있다. 전국시대의 철학자들은 깡패나 다름없었던 전국시대 군주들을 행정일선에서 물러나 자기수양으로써 자작농 사회의 생존을 위한 천지의 조화를 중재하는 "의식의 집전자"로 만들고 행정실무는 자신들이 담당하는 체제를 꿈꾸었는데, 그 필두에 여불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선제(전한)|전한 선제]] 정도를 제외하면 학자들의 이상을 순순히 따라준 황제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진한시대에 중국이 통일제국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우주와 국가, 신체의 철학적 교리가 구축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교리로 기(氣)와 음양오행을 체계화한 사상가의 계보를 여불위-회남자-동중서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여불위를 '''"우주를 [[코스모스]]로 인식한 제국의 설계자'''"라고까지 표현할 정도.[* Geoffrey Lloyd & Nathan Sivin (2008) '' The Way and the Word'' , "5. The Fundamental Issues of the Chinese Sciences"]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