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고전 (문단 편집) === 1990년대까지 === 현재와 비교할 수 없는 전 국민적 인기를 누렸던 시절. 국민 대부분이 알만한 선수들이 양교에 2~3명씩은 꼭 있었다. 특히 농구 종목에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 농구대잔치의 인기와 스타성 있는 선수들의 대거 출전으로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인기를 보여줬다. 대표적으로 [[김훈(농구)|김훈]], [[구본근(농구)|구본근]], [[김병철(농구)|김병철]], [[문경은]], [[서장훈]], [[신기성]], [[양희승]], [[우지원]], [[이상민(농구)|이상민]], [[전희철]], [[현주엽]] 같은 선수들이 있었다. 또 [[최희암]]과 [[박한]] 두 감독의 명장 대결도 백미였다.[* 90년대 초중반까지 두 대학의 스타들은 문자 그대로 '''국내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었다. 당시에도 아마추어인 대학선수와 현재로 치면 프로에 해당하는 실업농구팀들 사이에서 평균적인 실력차이는 존재했으나 외국인선수가 없다는 점 때문에 그 차이가 적었고, 대학팀들 중 톱급인 고대, 연대는 기아나 삼성과 동등한 라이벌급 전력이었다. 서장훈같은 선수는 대학 시절에 이미 국내 최고의 빅맨이어서 실업선수들이 린치를 해야 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연대는 프로 출범전에 실제로 두 차례 우승을 했고, 앞서 언급된 서장훈에 대한 린치와 이로 인한 서장훈의 오랜 공백, 유학이 없었다면 최소 한번은 더 우승이 유력했다.(즉, 서장훈의 재학시절에 '''직업농구선수를 포함한 리그에서''' 연대왕조가 열릴 뻔했다) 고대는 우승이나 준우승 경력은 없었지만 서장훈의 최대 라이벌인 현주엽을 포함한 슈퍼스타들이 즐비해 연세대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강력한 팀이었다.(기아에 업셋당했지만 95-96 정규리그에서 고대는 13전 전승을 거뒀다) 국내 투톱은 아니라도 어쨌든 최고 수준의 팀들이 치열한 라이벌 의식을 갖고 맞붙는 경기였으니 당연히 열기가 뜨거울 수 밖에 없다.] 1996년에는 연세대에서 개최된 제7회 범민족대회 및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도중 [[한총련]]에 의해 발생된 [[연세대 사태]]로 인한 수습 문제로 정기전이 개최되지 않았던 역사가 있다. 1998년 10월 3일에는 스포츠는 아니지만 [[아리랑TV]]의 [[Quiz Champion]] 추석특집에서 영어 퀴즈 대결을 벌인 적이 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100300099116008&ed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8-10-03&officeId=00009&pageNo=16&printNo=10182&publishType=00010|해당 기사]] 참조. 전반적으로 고려대가 앞섰으나, 보너스 라운드 댄스 배틀에서 승리한 연세대의 역전으로 1020 : 980으로 연세대가 승리했다.[* 연세대가 999점으로 나오긴 했지만 [[카운터 스톱|당시 점수판은 천 단위 적용이 안 됐다.]] 일의 자리를 빼고 십의 자리 이상만 적용하는 것은 당시 퀴즈에서는 1단위까지 점수를 썼기에 불가능했다. 또한 칸스토가 일어났다는 것은 주최측에서 상정했던 점수 구간을 아득히 넘길 정도로 예상외로 고득점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당시 수준을 짐작해볼 수 있다.] 반면 11월 4일에는 KBS2 《캠퍼스 최강전》을 통해 양교 신문방송학과가 겨룬 끝에 고려대가 이겼다. 2000년 초반까지는 총학생회에서 일컫는 정식 명칭을 '고연민족해방제' 또는 '연고민족해방제'로 한 적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