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산군/생애 (문단 편집) === 언문 사용 금지 === 한번은 왕의 악행을 비방하는 투서가 나돌았는데 왕은 분노하여 거액의 현상금을 걸며 범인을 잡으라고 명령했지만 범인을 잡는데 실패했다. 이에 왕은 화풀이로 그것이 언문, 즉 [[한글]]로 쓰여있었다는 이유로 [[훈민정음]]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 구결을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웠다. 문제는 이게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심각한 [[자승자박]]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훈민정음을 창조한 세종은 연산군의 고조부이다. 게다가 자신이 존경하던 증조부이자 세종의 아들인 [[세조(조선)|세조]] 또한 훈민정음을 더 정교하고 간단하게 만드는 표기법을 즉위 1년만에 만들었고 [[석보상절]]과 같은 글을 직접 짓는 등 널리 보급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런 직계 조상이 만든 언문 구결을 모조리 불태웠다는 것은 선대왕의 업적을 부정하는, [[패륜]] 차원을 넘어서 조선 왕조가 무의미한 짓을 했다고 후손이 스스로 인정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위험한 행위였다.[* 종종 조선시대 양반들은 계속 한자를 썼으니 훈민정음을 천시했을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양반들도 정음의 본래 뜻대로 음을 달아서 공부하다가 정음 없이 한자 읽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은근히 쓰기도 했거니와, 그게 아니라도 선대왕의 행적이고, 또한 애민정신이라는 창제취지도 유교사상에 부합했기 때문에 실용성이든 유교 관점 때문이든 충성 문제 때문이든 대놓고 비하 발언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세간에 훈민정음의 비하어로 알려진 언문이나 암클은 실제로는 훈민정음을 비하하는 단어가 아니였다는 설이 강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훈민정음에 대한 조선왕조의 공식입장은 '하늘이 내리신 대왕께서 인간으로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지혜로 백성들을 위해 만드신 성스러운 문자' 였다.] 하지만 정작 뒤에 나오는 흥청들의 음악 교본은 모두 언문, 즉 한글로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왕이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미 백성들에게도 한글 사용이 제대로 정착된 지 오래인데다 너무 밀어붙이면 왕실의 권위가 흔들린다는 문제 때문에 흐지부지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므로 "한글의 암흑기"까지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언문이 지식인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는 걸 엄두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왕에 대한 반감이 백성들에게까지 퍼졌거나, 백성들까지 끌어들여서 반(反) 연산군 활동을 하려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한 국가의 임금이라는 사람이 개인의 감정으로 선대 임금의 업적을 제대로 [[능욕]]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까여도 할 말이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