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의정 (문단 편집) == 위상 ==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하여 임금 바로 아래의 최고위직으로 위상은 높지만 실권이 큰 자리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영의정은 원로이자 [[조정#朝廷]] 영수라는 명목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 운영에 필수적인 담당 실무가 적었기 때문이다. 영의정의 입지는 국왕과 관료, 관료 내부 사이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따라 잦은 부침을 보인다.[* 이는 조선 초기의 판문하가 명목상 문하부의 우두머리이지만 도평의사사에는 참여하지 않는 명예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영의정부사로 바뀌고 나서도 처음 몇년간은 영삼사사(領三司事)의 후신인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와 앞뒤 순서를 오갔고, 일반적으로 집정(執政)으로 인식되었던 관직은 좌우 [[정승]]이었다. 그래서 현대로 보면 위상이 [[부통령]]겸 [[상원]]의장과 [[국무총리]]와 비슷하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 중 하나는 조선 초기에 좌정승이 판이조사(判吏曹事), 우정승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한 것이었다. [[판사(관직)|판사]]는 담당 부서의 업무를 감독하는 것이 주 업무로 문관(東班)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조선)|이조]]와 무관(西班) 인사, 군사를 담당하는 [[병조]]의 실무에 개입하는 좌우 정승의 권한이 담당 실무가 적은 영의정의 권한보다 실질적일 수 밖에 없었다. [[KBS 1TV]] [[징비록(드라마)|징비록]]에서도 이조판서로 영전한 [[류성룡]]에게 좌의정 [[정철]]이 자신에게 업무를 보고할 필요없이 소신대로 하라는 대사를 통해 좌의정의 권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세종의 장인 [[심온]]이 불평한 것과 [[구성군]]이 구훈(舊勳)에게 쉽게 밀린 것은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판상서사(判尙書事)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것으로 중서문하성의 재신들이 [[상서(관직)|상서]]의 [[판사(관직)|판사]]를 겸하며 중서문하성 중심의 정치를 시행하는 데 이용되었다.(당 초기에는 상서령/중서령/문하시중이 신료들의 수장으로 위치하였지만, 현종 말년이 되면 3품의 상서들이 '''동중서문하'''직을 겸직하면서 재상으로 업무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재상직이 2품에 위치하면서 실질적 업무부처인 상서6부와 괴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장관인 3품의 상서 위에 재상이 관리하는 판사직을 설치하였다.) 고려에서는 수상이 판이부사(判吏部事)를 겸한 것과 달리 조선 중기 이후에는 현직 삼정승이 이조와 병조를 겸판(兼判)하지 않았다. 실제로 육부(六部)의 위상이 떨어지던 고려에 비해 조선은 [[비변사]] 대두 이전까지 [[육조]] 위주의 정치가 이루어졌다. 조선의 판서는 정2품관이고, 고려의 상서는 정3품관이니 당연한 결과다. 겸판사(兼判事)는 세종 연간을 거치며 의정부 좌우 찬성(贊成) 및 참찬(參贊)에게로 넘어갔다가 [[1458년]](세조 4)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대체로 [[성종(조선)|성종]] 연간(1469~1494)까지 재상급 대신들이 부서와 업무에 따라 상설 혹은 특설된 겸판서(兼判書)로서 실판서(實判書)를 직접 지휘하는 형태로 남아있었고 이후에도 간간이 나타난다. 태종 연간의 [[이숙번]]은 종1품 의정부 찬성(贊成)이 최종 경력이었지만 정승급인 [[남재]], [[성석린]] 등을 호령했으며, [[하륜]] 역시 영의정을 꽤 했지만 좌의정 시절 힘이 더 강했다.[* 다만 하륜이 영의정을 하던 시절부터는 영의정의 위상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황희가 하기 전까지는 명실상부한 조정의 영수는 아니었지만.] 단종 때의 영의정은 [[황보인]]이였으나, 조정의 영수는 좌의정인 [[김종서(조선)|김종서]]였다. 세종, 문종의 고명대신이자 남재의 장손자인 [[남지]]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세조의 사돈이자 인수대비의 아버지인 [[한확]]도 좌의정이었으며, 세조의 책사 [[권람]]도 좌의정이었다. 세조의 계유정난에서 큰 공을 세운 [[홍달손]]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세조의 공신이자 훈구파 원로대신이던 [[김국광]]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정희왕후의 측근이자 왕실의 인척이던 [[홍응]]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중종반정 이후 공신들과 친하게 지낸 [[신용개]], [[김응기]]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중종(조선)|중종]] 연간(1506~1544) 후기 최강의 권신 [[김안로]]는 좌의정이었고, 중종 때 다른 권신인 [[심정]], [[이행]]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중종 때 조광조를 추천한 [[안당]]도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까지 지냈다. [[윤원형]]은 우의정이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일 때 최고 권력을 누렸지만 영의정일 때는 또다른 권신 [[이량(조선)|이량]]과 좌의정 [[심통원]]의 급부상으로 힘이 약해졌고, [[숙종(조선)|숙종]] 연간(1674~1720) 초기에 공작 정치로 권신이 된 [[김석주]]도 우의정으로 병권의 핵심이어서 역시 [[송시열]]의 제자이며 사형인 영의정 [[김수항]]마저 그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두둔할 정도였다. [[정광필]]의 손자인 [[정유길]]도 동인집권기에 야당인 서인임에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김수항 또한 남인인 [[허적]]이 영의정에 있을 때 좌의정에 있었던 적이 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재집권한 [[남인]]의 핵심 권력자였던 [[민암]]도 우의정이었고, [[홍봉한]]도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좌의정이었다. [[홍봉한]]의 동생인 [[홍인한]]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노론 4대신 중 가장 낮은 연배인 [[조태채]]도 우의정이었다. 그리고 영조 때 노론 핵심 권력자이자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이자 숙종의 작은 처남인 [[민진원]]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그리고 숙종의 외척이자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도 좌의정까지 지냈고, 그 아들인 [[민진장]]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그 외에 자의대비의 친척이자 인조의 외척이고, 현종과 숙종의 외척으로, 희빈 장씨를 추천했던 [[조사석]]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서인의 영수이자 노론의 영수이자 유림의 대표였던 [[송시열]] 역시 좌의정까지 지냈다. 그 뿐 아니라 세조의 외척이자 정희왕후의 형제인 [[윤사분]]과 [[윤사흔]]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또 소현세자빈인 [[민회빈 강씨]]의 아버지인 [[강석기]]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인조반정 공신이자 왕실의 외척이던 [[원두표]]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오명항]]도 병조판서 시절에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뒤에 우의정까지 올랐다. 소론 산림의 영수였던 [[윤증]]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무인 출신이자 적개공신이자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강순]]도 최종 관직이 우의정이었다. [[을사사화]]의 주역인 [[이기(조선)|이기]]와 [[정순붕]]도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 시절에 을사사화를 주도했으며 영의정 [[윤인경]]은 힘이 약했다. [[이기(조선)|이기]] 역시 영의정이 된 이후로는 예전보다 실권이 약간 약해졌고, 영의정에서 물러나기 직전에는 [[윤원형]]에게 실권을 다 빼앗긴다. 그리고 대윤의 핵심인 [[유관]]과 [[성세창]]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또한 노론 4대신 중에 좌장이던 [[이이명]], [[이건명(조선)|이건명]]도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영조 때 노론4대신의 일원인 [[이관명]]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태종의 명을 받들어서 영의정 [[심온]]의 사사를 주도하고 군권을 쥐고 있던 박습과 강상인, 심온의 동생 심정의 사형을 주도한 [[박은]]도 좌의정이었다. 정순왕후의 오빠이자 외척이던 [[김관주]]도 우의정을 지냈고, 안동김씨 일족이지만 벽파의 영수였던 [[김달순]]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같은 소론이었지만 희빈 장씨와 장희재에 대해 중벌을 주장한 [[박세채]]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희빈 장씨와 장희재에게 사약을 추천한 [[이세백]]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화완옹주의 인척이던 [[정희량]], [[정우량]]도 각각 좌의정, 우의정까지 지냈다. [[한효순]]도 광해군 시절에 우의정, 좌의정을 지내면서 폐모론을 주장했다. 송시열의 수제자인 [[이단하]]도 좌의정을 지내면서 강력하게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다. [[김종수(조선)|김종수]]도 좌의정 시절에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과 대립했으며 [[채제공]] 역시 좌의정을 지내면서 독상체제로 정국을 주도하였다. 예종의 장인이던 [[한백륜]]도 우의정까지 지냈고 정희왕후의 인척이던 [[성봉조]]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일원인 [[김이교]]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헌종의 총애가 각별했고 천주교를 탄압할 것을 주장한 [[이지연]]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따라서 '''단지 영의정까지 올라서 [[권신]]이 된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후술한 것처럼 수양대군, 김좌근처럼 실세 영의정도 있었지만 영의정으로 권신이 되었다기보다는 권신이 영의정도 한 것에 가깝다.] 하위직인 [[판서]]와 [[도승지]]도 왕의 신임이 두터우면 정승을 호령할 정도였다. 명종 연간의 [[외척]] [[이량]]은 이조판서로서, 또 다른 외척 [[심통원]]은 좌의정으로서, 영의정 [[윤원형]]보다 권력이 강했고, [[광해군]] 연간(1608~1623)의 권신들인 삼창(三昌) 중 [[이이첨]]과 [[류희분]]도 각각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로서 권력을 행사했으며, [[박승종]]은 영의정을 하기 전에 병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겸하면서 각종 옥사를 처리했고 [[정조(조선)|정조]] 연간(1776~1800) 초기의 [[홍국영]]은 도승지, 숙위대장(宿衛大將), 훈련대장(訓鍊大將), 금위대장(禁衛大將),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 따위의 직책을 맡으면서 모든 소(疏)와 의견이 그를 거쳐 왕에게 전달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 경호실장, 합참의장or참모총장<훈련도감은 조선후기 중앙군의 중심으로 급료를 지급하는 특수병들이였고, 함께 한성을 방위하는 어영청과 금위영보다 앞선 위치>, 참모총장, 국세청장+조달청장, 한국은행장 권한보유<각 군영은 화폐주조권한이 있음>를 가진 것]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순원왕후의 장인인 [[김조순]]도 이조판서, 병조판서, 대제학, 금위대장, 훈련도감대장 등을 지냈다. 신정왕후의 장인인 [[조만영]]도 이조판서, 호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금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서 잡채상서로 불렸던 [[이충]]도 호조판서, 우찬성까지 지냈다. [[소헌왕후]]의 아버지이자 세종의 장인인 [[심온]]도 세종 즉위년 영의정에 올랐을 때보다 태종 시기에 이조판서 등을 지낼 때 권력이 더 강했다. 심온의 아들 [[심회]]도 세조 말년 영의정을 지낼 때보다 성종 시기에 원상을 지내고 좌의정일 때 권력이 더 강했다. 인조 시기의 권신이자 인조반정 1등 공신 [[심기원]]도 좌의정까지 지냈고, [[심희수]]도 선조 시기에는 좌의정, 광해군 시기에는 우의정을 지냈다. 좌의정 [[심정]]의 손자 [[심수경]]도 선조 시기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효종(조선)|효종]]의 사위 [[심익현(부마)|심익현]]의 아버지 [[심지원]]도 효종 시기에 영의정을 지내고 [[현종(조선)|현종]] 시기에 원상과 좌의정을 지냈다. [[이항복]] 역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광해군 때 다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이덕형]] 역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광해군 때 다시 영의정을 하기 전에 좌의정을 지냈다. 선조 말기에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도 좌의정을 지내던 시절에 영의정 [[윤승훈]]을 탄핵한 일이 있었다. [[권대운]]도 남인 2차집권기에 영의정을 지낼 때보다 남인 1차집권기에 우의정, 좌의정을 지낼 때가 권력이 더 막강했다. [[홍치중]]도 영의정을 지낸 뒤에 좌의정을 다시 한 번 더 지냈다. 탕평책을 입안한 [[조현명]]도 영의정을 지낸 뒤에 다시 한 번 좌의정을 지냈고 동생 [[조문명]]도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같이 탕평책을 입안한 [[송인명]]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성종 초에도 성종의 장인이자 외척인 [[한명회]]가 좌의정으로 있고 정희왕후의 처남이자 역시 외척인 [[윤사흔]]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권력을 행사한 적이 있고 영의정 [[정창손]]은 한명회와 윤사흔의 의견을 따랐다. [[오윤겸]]도 영의정을 한 뒤에 다시 한 번 좌의정을 더 지냈다. [[홍서봉]]도 영의정을 한 뒤에 좌의정을 지낸 적이 있고 [[심열]]도 영의정을 한 뒤에 우의정, 좌의정을 또다시 지낸 적이 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효종의 장인인 [[장유(조선)|장유]]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순조 때 [[김재찬]]도 영의정을 한 뒤 다시 영의정을 지내기 전에 좌의정을 또 한 적이 있고 [[이시수]]도 영의정을 한 뒤에 좌의정을 다시 지낸 적이 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이자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도 숙종 시기에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다. 또한 역시 숙종 때 인현왕후의 큰오빠이자 숙종의 큰 처남인 [[민진후]]도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맡으면서 실권을 행사했다. 한성판윤이나 공조판서가 정치적 영향력은 없는 자리인걸 감안하면 그냥 본인이 권신이라 강한거지 관직 때문에 강한게 아니었다. 그리고 숙종의 작은 처남이자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인 [[민진원]]도 좌의정을 지내면서 실권을 행사했다. [[영조]] 시기에 영의정을 지낸 [[심수현]]도 영조 초기에 병조판서 겸 금위대장을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 외에 [[김만중]], [[김만기(조선)|김만기]] 형제도 병조판서,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특히 김만기는 군권까지 쥐고 있었다. [[이세백]]도 좌의정을 지내면서 희빈 장씨의 사사를 주청했다. [[박원형]]도 좌의정을 할 때 영의정이던 귀성군 이준을 끌어내리는 데 앞장섰다. [[최항(조선)|최항]]과 조석문도 역시 세조 말에 영의정을 지내다가 성종 초에 다시 좌의정을 지내면서 실권을 가졌다. [[윤자운]] 역시 성종 초에 영의정을 하다가 다시 우의정을 지내면서 실권을 가졌다. [[김질]] 역시 예종 때 좌의정을 하고 성종 때 다시 우의정을 했다. [[한치형]] 역시 죽기 직전 영의정을 할 때보다는 우의정과 좌의정 시절에 무오사화 때 사화를 주관하면서 힘이 강했으며 [[어세겸]]도 좌의정 시절에 실록청총재관을 했다. 그리고 [[윤필상]]도 오랜 기간에 영의정을 했지만 우의정 시절에 폐비 윤씨의 폐출을 강력하게 주청하고 좌의정 시절에는 폐비 윤씨 사사를 주청하면서 실권을 가졌다. [[정인홍]]도 우의정 시절에 봉산옥사를 처리했고 좌의정 시절에 대북정권의 정국을 주도했다. 광해군 때 실세였던 [[한효순]], [[민몽룡]]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인순왕후의 6촌인 [[심희수]]도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광해군 때 다시 우의정을 지냈다. 성종의 측근인 [[현석규]]는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를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정창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영의정을 했지만 좌의정 시절에 단종 사사를 주청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던 [[심기원]]도 좌의정을 지냈고, [[김자점]]도 좌의정 시절에 [[민회빈 강씨]]의 사사를 주청했다. [[병자호란]] 당시에 척화파였던 [[청음 김상헌|김상헌]]도 최종 관직이 좌의정이었고, 병자호란 당시 대청 강경파로써 자결을 한 [[김상용]]도 최종 관직이 우의정이었다. 노론 선봉이던 [[이관명]]도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소론 선봉이던 [[이태좌]]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기자헌]]도 영의정을 했지만 우의정과 좌의정 시절에 광해군을 강력히 지지했고 영의정 시절에는 약간 힘이 약해졌다. [[윤두수]] 역시 좌의정 시절에 힘이 강했으며 영의정 시절에는 힘이 약해졌다. [[이원익]]도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번 영의정을 했지만 영의정 시절보다는 판서와 우의정, 좌의정을 하던 시기에 힘이 강했다. 대윤의 영수였던 [[윤임]]도 형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우찬성을 여러차례 하면서 권력을 가졌고 [[유인숙]] 역시 이조판서와 우찬성을 하면서 권력을 가졌다. 송시열과 더불어 양송으로 불렸던 [[송준길]]도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하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광해군 때 북인의 거물이던 [[박홍구]]와 [[조정]]도 각각 좌의정, 우의정까지 지냈다. 그리고 윤원형, 이기, 정순붕과 더불어 을사사화를 일으키는 데 앞장선 [[임백령]]도 이조판서, 우찬성까지 지냈고 역시 을사사화를 일으키는데 앞장선 [[허자]]도 예조판서, 공조판서, 형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우찬성, 좌찬성을 하면서 힘을 가졌다. 태종이 기초를 놓고 세종이 짓고 문종이 마무리한 군신간의 정치적 균형관계를 일거에 무너뜨린 계유정난의 부작용으로 인해 조선 조정 내에서 실세 권신과 그를 따르는 파벌집단들의 개념이 생기면서, 권신들이 세력 유지를 위해서 명망은 높으나 세력기반은 없는 말년 원로들에게 모양새 좋게 넘기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특히 영의정 자리를 누가 먹냐를 놓고 상대 파벌과 죽자사자 사생결단을 내다가 피보느니 차라리 중립인 인사를 기용하는 걸로 합의하는 경우가 잦았다. 중종 연간의 [[정광필]]은 권신 이항(李沆), [[심정]], [[이행]], 나중에는 [[김안로]] 등이 모두 명목상의 영의정으로 내세운 경우이고,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이후에도 [[반정]] 4대장 [[이귀]], [[김류]], [[이서(1581)|이서]], [[신경진]] 등의 합의로 [[이원익]]이 영의정이 되었다. 인종과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홍언필]]과 [[윤인경]]의 경우에도 대윤의 [[윤임]], 유관, 유인숙, 소윤의 [[윤원형]], [[이기(조선)|이기]], 정순붕, 임백령, 허자 등의 합의로 영의정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과 [[상진]]도 [[심통원]], [[이량(조선)|이량]], [[윤원형]], [[이기(조선)|이기]] 등의 합의로 영의정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영의정은 조정의 행정을 총괄하는 수장 이미지가 강하고, 좌의정은 조정의 다수파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강하며, 우의정은 조정 내 병권과 사법권, 삼사의 대간과 옥당을 총괄하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리고 영의정이 온건파이면, 좌의정과 우의정은 강경파인 경우가 많기도 했다. 또한 영의정은 집권붕당의 주류 출신들이 많이 맡았지만 좌의정과 우의정은 집권붕당의 주류 출신들도 맡았으나 집권붕당 비주류와 야당들도 꽤 많이 맡은 경우도 있었다. 영의정이 조정 대신들 중 신망이 높거나 명망이 높은 대신, 즉 명신들이 맡는다면, 좌의정은 권력이 막강하거나 정파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대신, 즉 권신들이 맡는다고 할 수 있고 우의정은 무신 출신의 대신이나 무관들이나 대간들에게 신망이 높은 대신, 즉 무인, 대간을 총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맡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의정은 대신들 중에 나이가 상당히 많고 연배가 높은 노대신들이 맡는 경우가 많고 좌의정은 그 중간 쯤인 대신들이 맡는 경우가 많고 우의정은 나이가 약간 낮거나 연배가 낮은 대신들이 맡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의정이 과연 실권은 없고 명예만 있는 관직이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영의정쯤 되면 이미 주요 관직을 다 거쳐 올라온 사람들이라 그 관록이 결코 만만치 않다. 실제 정책 토론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좌의정이고, 정책이나 현안에서의 법률이 관여토록 하는 것은 우의정이며, 주 현안을 집행하는것은 육조이기 때문에 그냥 보면 영의정은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지만, 그 과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조율하기가 바로 영의정의 역할이다. 여러 대신들이 이런저런 목소리를 낼 때 토론 과정이 과열되지 않도록 조절하고, 가장 건설적인 방향으로 결정을 이끌어내도록 만드는게 영의정의 주 업무인 것이다. 또한 권신이나 그 당여 중에 어전에서 지켜야할 선을 넘으려는 자가 있으면 자제시켜서 국왕이 최소한의 체면은 지키게 하는 데는 역할도 수행했기에 영의정 제도가 주효하기는 했다. 의미 있는 권력을 누린 영의정으로는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으로 집권하여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가 된 [[세조(조선)|수양대군 이유]], [[세조(조선)|세조]] 연간(1455~1468) 말년부터 성종 연간 초기까지 [[원상제|원상]]이었던 [[한명회]]와 [[신숙주]], 모두 일찍 죽기는 했지만 [[1506년]](연산군 12)에 [[중종반정]]을 주도한 3대장인 [[박원종]]과 [[유순정]]과 [[성희안]] 등이 있었다. [[선조(조선)|선조]] 연간(1567~1608) 초기의 [[이준경]]이나 선조 중기의 [[류성룡]]이나 선조 말기의 [[류영경]]이나 광해군 연간 후기의 [[박승종]]이나 숙종 연간 초기의 [[허적]]도 상당한 힘이 있었다.[* 이준경은 선조의 원상으로, [[문정왕후]]를 반면교사로 삼은 [[인순왕후]]는 [[수렴청정]]이라는 명목하에 모든 결정권을 이준경에게 넘겼다. 높은 지위에 명종 사후 후계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책임지고 인순왕후의 결정을 도왔으며 조정의 신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종 연간 초기 남인은 [[서인]]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강경파 청남(淸南)과 온건파 탁남(濁南)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갈등하였고 온건파 남인의 대신인 허적의 중재를 통해 청남, 탁남, 서인이 혼합된 국정이 유지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결정은 모두 허적을 통해 이루어졌다. 조정의 인사가 허적의 사랑채에서 행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는 그나마 왕권에 우호적이었던 남인들을 기용하려 했던 숙종의 의사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남인의 권력이 너무 강해졌다고 판단한 숙종은 [[1680년]](숙종 6) 허적을 제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신환국]]을 일으켰다.] 또한 [[숙종(조선)|숙종]] 말기의 노론4대신 중의 우두머리인 [[김창집]]도 영의정으로 힘을 행사했다.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는 [[정조(조선)|정조]] 말기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으로서, [[순조]] 초기에는 원상과 영의정으로서 권력의 정점을 누렸다. [[철종(조선)|철종]] 연간(1849~1863)에 [[신 안동 김씨]]의 수장이었던 [[김좌근]]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세도정치]] 권력의 정점을 누렸다. 조정 서열 1위의 관직답게 [[배향공신]]을 가장 많이 배출한 관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