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혜옹주 (문단 편집) == 생애 == 1858년(철종 9) 궁인이었던 범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철종의 5남 6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녀로, 사실상 철종의 [[무남독녀]]로 볼 수 있다.[* [[헌종(조선)|헌종]]도 숙의 김씨에게서 딸을 얻었지만, 옹주로 책봉 받지도 못하고 요절했다. ] 1866년(고종 3) 2월 13일, 9세의 나이로 정식으로 옹주로 책봉되고, 어머니는 궁인에서 종2품 숙의로 품계가 오른다. 이때 처음에는 영숙옹주(永淑翁主)로 책봉되었다가[*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철종(조선)|철종]](哲宗) 때의 [[숙의 범씨|궁인(宮人)인 범씨(范氏)]]가 낳은 딸이 지금 9살이 되었다. 그를 영숙옹주(永淑翁主)로 봉하고 범씨는 숙의(淑儀)로 봉해줄 것에 대하여 오늘 정사(政事)에 하비(下批)하도록 하라."하였다.《고종 실록 3권, 고종 3년 2월 13일 계묘 2번째 기사》], 같은 날 영혜(永惠)로 작호가 바뀌었다.[* "대왕대비의 하교를 받았으니 귀주(貴主)에 대한 봉작을 '영혜(永惠)'로 고쳐 써서 들이라." 하였다.《고종 실록 3권, 고종 3년 2월 13일 계묘 3번째 기사》] 이후 도사 박원양의 아들 [[박영효]]와 혼인했으나,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15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죽기 전에 병이 심하다는 실록의 기록과 대행대비([[철인왕후]])의 묘지문에서 철인왕후가 병에 잘 걸리는 옹주를 걱정하였다는 지문이 있는 걸로 보아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모양이다.] [[조선]]의 법도에 따르면, [[부마]]는 왕의 사위이므로 아내인 공주나 옹주가 죽더라도 재혼을 할 수 없는 것이 국법이었다. 그러나 [[박영효]]는 고종의 허락을 받아 새로운 후처를 들이진 못했지만 [[궁녀]] 범씨를 [[첩]]으로 들여 자녀를 낳았고 손주들도 보았고 [[이청|증손주]]도 봤다.[*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교육자)|박찬주]]는 [[의친왕]]의 차남 [[이우]]와 결혼했다. [[일본]]은 이우를 [[영친왕]]이나 [[모모야마 켄이치|이건]](의친왕의 장남)처럼 일본 여성과 결혼시키려 했으나, 이우는 조선 여성과의 결혼을 고집하여 일제에 맞서서 [[박찬주(교육자)|박찬주]]와 결혼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 박영효는 사망한 후, 정식 [[부부]]인 영혜옹주와 같은 묘에 묻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