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송논쟁 (문단 편집) == 배경 == 예송논쟁은 정치적, 철학적, 윤리적 상징성이 엄청났던 사건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단순한 복식 정도였지만, 배경적으로는 서인과 남인(더 정확하게는 동인) 시절부터 있었던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조선의 통치 체제 문제까지 걸려 있던 일대 격전이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효종의 정통성과 맞물려 대폭발로 이어진 것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실제 송시열이 체이부정 이야기를 꺼낸 순간 정태화가 기겁하고 막아서며 경안군 이석견을[* 현종의 사촌동생이자 인조의 장손이다. ] 이유로 송시열을 막았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예송은 시작부터 왕의 정통성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였다. 다만 정통성 논쟁은 말을 꺼낸 순간부터 역모로 처벌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나마 곁다리로 낀 상복으로 논쟁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 논쟁 당사자들도 상복은 그저 꼼수라는 것을 시작부터 알고 있어서, 정태화가 이석견(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을 이야기하거나, 윤선도가 상소에서 왕의 적통과 종통을 이야기한 것이다. 논쟁에서 진 이후, 야당으로 계속 갈 것 같던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정계 개편을 시작하고, 먼 훗날이긴 하지만 숙종과 경종, 영조 대에 여러 위기를 넘으면서 다시 정권을 잡는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호위청, 어영청 등 군사권을 가진 지위를 사실상 독점해 오면서 그 기반을 마련하였다. 비록 인조의 공신들인 공서파들이 사라졌지만, 같은 학파의 선후배 사이이기에, 그들의 아들들은 서인의 일원으로서 남아 있었고, 현종때에 처족인 한당의 김육의 자녀들 같은 경우에도 왕실의 일원으로 예송논쟁에서 산당의 송시열과 싸웠지만, 역시나 같은 서인의 일원으로 숙종 초기의 환국에서 서인의 일원으로 일하였다. (이때 군사권을 [[김석주]]가 맡고 있었다.) 이들은 숙종의 세자 때 아내로 사계 김장생의 가문에서 뽑았다가, 사망 이후에 서인의 중진 여흥 민씨에서 중전을 선출했을 만큼 힘을 가졌다. 세자/왕의 어미가 며느리를 그렇게 뽑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었겠는가? 숙종이 명성왕후와 외숙 김석주 및 첫 장인인 김만기와 둘째 장인인 민유중, 그리고 장렬왕후가 사망한 이후에 기사환국으로 장희빈을 중전으로 맞아들이고 남인정권을 만들었지만, 몇해 안가서 갑술환국으로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서인들을 불러들였으니 이들의 권력 독점은 사실 꽤 오래된 것이였다. 또한 서인의 명문가들은 대다수가 조선 초기와 중기에 관학파나 훈구파에 속했던 가문들이 많았으므로 관학파 및 훈구파와도 연관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