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송논쟁 (문단 편집) === 이기이원론 vs 이기일원론 === 서인과 남인이 효종의 정통성을 걸고 다투게 된 데는 '''왕의 경우가 사대부의 경우와 같은가'''라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는 견해의 차이도 있었다. 왕의 경우가 사대부의 경우와 같다면 당연히 효종은 집안의 2남일 뿐이지만, 왕위가 다른 것보다 앞선다고 보면 효종이 장자냐 아니냐는 접고 넘어갈 일이 된다. 이 차이에서 정통성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왕가의 예법이 사대부와 다르다면 당연히 왕의 정통성 문제는 제기될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왕이 다스리고 신하는 보좌하는 나라'인가, 아니면 '왕과 신하가 같이 다스리는 나라'인가라는 질문에, 두 견해를 각각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이이(조선)|이이]]의 이기일원론이 학문적으로 지탱해주고 있었다''' 공자가 '仁'이라고 말한 물체의 본질인 理와 그것이 발현되어서 눈에 보이는 것을 氣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어떠한 움직임에 대하여서 理氣가 어떻게 움직여졌는가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이론이다. 이기이원론은 정통적인 성리학의 개념으로 理는 氣와 존재가 다른 것으로 理가 먼저 움직임을 결정하면, 氣는 이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기일원론은 理와 氣는 원래 하나였으니 理가 움직이면 氣도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다.[* 사실 이기일원론은 순자의 '화성기위론'과도 연계될 수 있으며, 비록 사물인 氣라고 하더라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의미이다.(이것은 서울의 노론들 중에서 북학파가 나올 수 있는 기반이다) 반대로 이기이원론은 정통적 성리학의 주장이지만 理를 깨닫는 것만 중시하고, 현실 활동에 대한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가 먼저고 기가 따른다면, 조선의 정치도 국왕의 움직임을 신하가 따르는 것이 된다. 이황의 학맥이 기반이 된 동인의 분파인 남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여 국왕과 신하의 예가 다르다고 보았다. 물론 이와 기가 대등하다고 보았던 이기일원론의 이이를 계승한 서인들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밀리는 것은 붕당의 기반이 되는 학맥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 되었다. [* 불교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이기이원론은 소승불교에, 이기일원론은 대승불교에 비유할 수 있다. 소승불교[* 공식적인 명칭은 부파(部派) 불교이다.]에서는 개인의 노력과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지만 부처(佛)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즉 대중들이 깨달음으로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아라한]]으로, 아라한의 위(位)는 불위(佛位)가 아니다. 즉 소승불교에서 부처=왕으로 본다면, 왕은 절대자의 위치에 있다. 이(理)와 기(氣)는 다르므로 임금의 경우와 신하의 경우는 다른 것이다. 반면에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불성(佛性)이 있으므로 누구나 노력하면 부처(佛)가 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부처=왕으로 본다면, 부처(佛)는 수많은 보살들 중에서 깨달음을 먼저 얻은 보살일 뿐 즉 왕의 절대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理)와 기(氣)는 근본은 같은 것이니 임금의 경우와 신하의 경우가 다르지 않다.] 어느 왕조이든 (그리고 중국도 마찬가지이지만)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면 왕과 개국공신들 사이의 관계정립은 중요한 이슈였고, 조선은 [[이방원]]이 [[정도전]] 등 공신들을 척결하면서 관계를 확립한다. 이와 함께 조선은 정치 이념인 유교적 이상 사회를 위한 [[왕도정치]]를 추구하면서, 우리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절대 왕정을 펼치는 국가가 된다. 이런 절대 왕정의 분위기 속에서 [[연산군]] 같은 왕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이 유달리 효(孝)를 중시한 건, 효(孝)는 충(忠)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즉 조선은 철저한 신분사회의 국가였다. 사대부도 지배계급으로서 신분사회의 혜택을 누렸지만 역설적으로 이때문에 사대부도 이 신분제의 정점에 있는 왕(王)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고려에서처럼 [[무신정권]]으로 왕을 갈아치우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도 이때문이다. 무력을 압도하는 정신적 사상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절대 왕정에 균열이 생긴게 바로 방계 출신으로서 왕위에 오른 선조 이후부터다. 붕당이 시작되면서 서인의 실질적인 영수 이이, 예송논쟁의 보스 송시열까지 끗발 센 놈들이 계속 나타났고, 왕의 정통성에 흠이 잡히면 왕권은 흔들렸다. 기본적으로 '근왕파'인 동인의 일파인 [[북인]]들을 중심으로 국정 운영을 하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나면서 사색 당파 중 한 세력인 북인이 완전히 몰락했다. 결국 이때는 판이 서인 중심으로 짜이면서[* 집권층인 서인도 한당, 산당, 원당 등으로 분리되었으나 송시열 대에는 거의 완전히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약간의 남인을 포함하는 형태로 양반층이 구성되었으니, 정통성이 허약한(그리고 이상하게 재위 기간 동안 자연재해가 잦았던) 효종 초기의 경우는 서인을 끌어안지 않으면 국정 운영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결국 국왕들은 왕권을 서인을 냅다 쳐낼 수 없었다. 대신 상대적으로 약했던 남인을 지원하면서 대립의 균형을 잡았다.[* 실제로 국왕권을 강화하고 싶던 후대의 왕들은 꾸준히 남인에게 관심을 보였다. 완론 탕평을 주장한 영조도, 준론 탕평을 주장한 정조도 남인 세력은 항상 친위 세력에 포함했다.] 덧붙여, 두 학파 모두 이와 기를 따로 논할지라도 아예 따로 존재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만약 완전히 하나가 독립적이라면 '이기일원론'이 아니라 '이 일원론'이나 '기 일원론'이라 논해야 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치에 빗대어 얘기하자면 __군주와 신하가 (관계야 어찌됐건) 함께 존재해야 한다__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었다는 뜻이다. 신하들 없이 임금만 따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약술해보자면, 이와 기의 하나임을 계속 밀어부치게 되면, 기보다는 이의 입지가 매우 애매해지는데, 바로 이것이 [[사단칠정논변]]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이기일원론인 노론판이 되자, 이번에는 인물성이론과 인물성동론으로 싸우는 [[호락논쟁]]이 시작되게 되는데 이는 이이의 이통기국에서 이통을 강조할 것인가 기국을 강조할 것인가라는 점에서 대립한 것이다.[* 사실 이통 쪽이 주자의 성리학에는 더 가깝긴 한데, 이와 기중에서는 기를 강조해서 양자를 비슷하게 만들어놓고, 다시 거기서 이를 강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호락논쟁이 양란 이후 신분제와 기존 질서 붕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문제인데, 호론이 주류가 되면서 신분제 유지강하로 간다. 송시열-권상하-한원진으로 이어지는 학파에서 권상하·한원진이 전형적인 호론이다. 이 때문에 왕이나 사대부는 성리학을 배웠다는 점에서 같지만, 성리학을 못 배워 먹은 것들과는 다르다는 결론이 나와버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