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수 (문단 편집) ==== 그리스도교의 영향 ==== 무함마드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하다. 꾸란의 예수 관련 구절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정경]] 복음서와 [[외경]] 복음서 등을 의식한 흔적이 발견되며, 가령 꾸란 3장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마리아와 가지는 인간관계, 마리아의 어린 시절은 외경인 [[야고보 원복음서]]에서 강력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꾸란의 예수 탄생 이야기는 7세기 초 저작물인 차명-마태오 복음을 연상시키며, 예수가 진흙으로 참새를 만들었다는 꾸란 3,49의 이야기는 외경인 [[토마 유년기 복음서]]에 나온다. 나병 환자를 살리고 눈먼 이를 보게 했다는 꾸란 속 기적 묘사는 당연 정경 복음서에도 나온다. 곧 어떤 식으로든 아라비아의 (그것도 풍부한 외경 전승을 간직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한때 거상이던 무함마드가 접했음은 분명하다. 이 공동체로는 [[네스토리우스교]], 아리우스주의 등 여러 후보가 거론되지만 확실하진 않다. 가장 널리 알려진 후보는 [[네스토리우스교]]이다. [[네스토리우스교]]는 예수 안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엄격히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제도 교회의 핍박으로 동쪽으로 쭉 도피한 네스토리우스 교회들은 [[파르티아]]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북상할 무렵 중요 도시에 발판을 마련하고 아랍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학교]]와 [[수도원]]이 결합된 제도로서 흩어져 있던 네스토리우스 신자들에게 어려운 환경에도 생존할 수 있는 지식과 신앙심을 부여하고 공동체적 연대 의식을 가지게 해 주었다. 만약 정말로 [[이슬람]]에 [[네스토리우스교]]의 예수 이해가 반영된 것이라면, 무함마드가 어린 시절 삼촌과 같이 시리아에 무역을 하러 가던 중 어느 늙은 [[수도자]]에게서 환영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일화에서의 수도자가 네스토리우스교의 수도자일 수도 있게 된다. 또한 무함마드가 히라산 동굴에서 첫 번째 계시를 받은 이후 찾아간 사람인 '와라카 빈나우팔(ورقه بن نوفل)'은 그리스도인이었다.[* 무함마드는 첫 번째 부인인 하디자 빈트후와일리드의 친척이다.] 와라카(ورقه, 아랍어로 '종이')라는 이름을 보면 그리스도교 교리에 지식이 어느 정도 갖춰진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와 신을 분리해서 본 [[아리우스파]] 및 [[유니테리언]]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반면 [[단성론]]과는 상극이다. 이집트는 [[이슬람주의]]의 박해가 극심한 지금까지도 [[콥트 정교회|비칼케돈 합성론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이다. 반면 [[카르타고]]는 단성론이 번성하던 [[이집트]]와 [[시리아]]보다 무슬림에게 늦게 정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오늘날 튀니지에는 극소수나마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남아있는데 바로 프랑스 식민 지배의 영향이다.] 바로 카르타고가 위치한 이프리키야가 [[도나투스파]][* 성령의 강림 없이는 예배가 무효가 된다고 주장하던 고대 그리스도교 분파]의 집산지였던 데다 [[반달 왕국]]의 영향으로 아리우스파의 영향력 및 아타나시우스파 사이의 긴장이 강했기 때문이다. 도나투스파 VS 정통 칼케돈 교리와 아리우스파가 난립하던 혼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과거 동로마 제국 영토 중에서 가장 빠른 개종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다만 이건 예전까지의 정설이었고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14세기까지, 길게는 15세기 말까지 튀니지에 그리스도교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14세기면 콥트교 다수 국가였던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콥트교가 이슬람에게 다수를 허용한 시기이다. 튀니지에서도 그리스도교가 상당히 오래 버텼다는 소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