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수 (문단 편집) === 공생애 === >예수께서는 서른 살가량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는데 >---- >[[루가의 복음서]] 3장 23절 중([[공동번역 성서]]) 예수는 모종의 이유로 [[세례자 요한]]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30살 즈음에 공생애를 시작했다고 기록한다. 예수의 신학 핵심은 [[주기도문]]/[[주님의 기도]]로 요약되는 신의 정의(正義) 실현과 죄의 용서였다. 이 신학은 당대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있던 [[이사야]] [[예언자]]의 신학과 [[다니엘]]서의 종말론, 에세네파의 메시아론이 혼합된 복합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흔히 오해되는 부분이지만, 예수와 바리사이의 대결을 '율법 준수의 널널함 vs 율법 준수의 엄격함'으로 봐서는 안 된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마태오 5장 17-20절, [[공동번역성서]], [[산상 수훈]] 가령 혼인에 대해서는 예수가 바리사이보다 훨씬 더 엄격한 해석했으며[*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장 11-12절, 공동번역)], 율법을 준수하며 성전을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바리사이와 공통되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읽지 않고 적극적으로 재맥락화하여 읽는 것 역시도, 유다교 내부에서 존재하던 독법이었다. 가령 마카베오기는 안식일 율법을 재맥락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을 따라잡은 '''그 군대는 맞은쪽에 진을 치고 안식일에 그들을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 그러나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다. 돌을 던지지도 않고 자기들의 피신처를 봉쇄하지도 않고, “우리는 모두 깨끗한 채로 죽겠다. 너희가 우리를 부당하게 죽였다는 것을 하늘과 땅이 증언해 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아내와 자녀와 가축과 더불어 죽어 갔다'''. ...... 마타티아스와 그의 벗들이 ... 서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 형제들이 한 것처럼 한다면, 우리가 모두 목숨과 규정을 지키기 위하여 이민족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이제 곧 그들은 이 땅에서 우리를 몰살시킬 것이다. 안식일에 우리를 공격해 오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든 맞서 싸우자. 그래야 피신처에서 죽어 간 형제들처럼 우리가 모두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 >---- >마카베오상 2장 32-41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그렇다면 예수의 율법 해석이 가진 독특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리사이가 '깨끗함'을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개념으로 사용하는 동안 예수는 '깨끗함'을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개념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참고: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 《예수》)] >예수가 비교적 가까이 대한 바리사이들도 깨끗함과 불결함의 구분을 매우 중요시했다. >이 점에서 예수는 바리사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예수에게도 깨끗함과 불결함은 거룩함과 속됨에 비할 만한 것이었다. 예수에게 관건은 성령께 의탁하여 더러운 악령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안에서 나오는 것, 곧 악한 말과 행동으로 불결해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사람을 참으로 더럽힐 수 있는 것이다. ...... >예수는 근본적인 면에서 바리사이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다시 말해 불결함의 원인이 어디서 발단하는지 던진 물음에서 구별된다. 예수는 오직 이 문제에서만 바리사이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다. 그러나 깨끗함과 불결함의 근본적인 차이는 엄연히 남아 있다. 차이는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예수는 깨끗함을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여겼다. 예수에게 관건은 깨끗함을 지키고 부정을 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깨끗함을 적극적으로 획득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더러워지는 이유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서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소극적으로 깨끗함을 유지하려면 감염될 만한 불결한 것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피해야 한다. 즉 경계선을 긋고 구별할 때만으로 깨끗함을 지킬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바리사이'라는 단어는 "제한하다, 구획하다, 경계를 정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죽은 사람으로 인해 불결해지지 않으려면 시신과의 접촉을 피하고, 지속적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에게 '피하기'와 '거리 두기'가 가장 중요한 실질적인 규정이다. 반면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깨끗함을 지닌 사람은 접촉하여 불결해질까 봐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전염성이 강한 깨끗함을 지니고 있어서 그 깨끗함으로 불결한 것을 청결하게 바꿔 놓는다. 그의 깨끗함은 공격적이고 승리를 거둔 것이어서 불결함을 거뜬히 물리친다. >그러므로 예수는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고칠 수 있었고, 하혈하는 여인이 자신의 옷을 만져 낫게 할 수 있었으며, 죽은 이에게 손을 대어 깨어나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예수는 세례 때 받은 성령으로 더러운 영들{{{-2 (악마들)}}}을 몰아내고 승리할 수 있었다. 당대의 믿음에 따르면 대부분의 질병은 악마의 활동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병자들을 치유할 수 있었다. 악마는 {{{-2 (더러운)}}} 죽은 영이기 때문이다. ...... 예수는 깨끗함이라는 원천을 내면으로, 마음으로 옮겨 놓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윤리화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주술적인 영향에 대한 두려움을 바르고 단정하게 살아가라는 경고로 대체한 계몽가가 아니다. ...... 이렇게 예수는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깨끗함'을 적극적이고 전투적으로 확장해 나간다. >----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130-133쪽 또 하나 짚고 넘어갈 오해는 바리사이에 관한 것이다. 신약에서는 바리사이가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며 비판하지만, 신약의 서술을 신앙으로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바리사이를 절대악처럼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바리사이 신학의 긍정적 면모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인정되며, Martin Ebner, Stefan Schreiber 등의 공저 《신약성경 개론》에서는 바리사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리사이(Pharisäer): 초기 유다교 평신도 운동의 주창자들로서, 통상 사제들만이 준수하는 정결 규정들의 보편화 및 민주화와 일상에서 그것들의 실행을 통해, 이스라엘을 거룩하고 사제다운 백성으로 만들고자 했음. >---- >-[[https://www.bundobook.co.kr/goods/view?no=13740|《신약성경 개론》]], Martin Ebner/Stefan Schreiber(Hrsg.), 이종한 번역. 902쪽. 비슷하게, 요아힘 그닐카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슈베르트는 바리사이 율법해석의 민주적 원칙을 거론한다.(Die jüdischen Religionsparteien im Zeitalter Jesu. In: Kurt Schubert (Hg.), Der historische Jesus und der Christus unseres Glaubens.(Wien 1962) ...... 진지한 종교성으로, 성덕의 추구로, 공중과 동떨어지지 않은 생활로 그들은 광범한 민중 속에서 큰 존경을 누리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지적하기를, 백성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이 하도 커서 기도든 제사든 예배행사 일체가 그들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한다.(Josephus, Ant. 18,15) 게다가 그들은 평신도 운동으로서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처지였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은 특별히 매력을 발휘했을 것이 틀림없다. >---- >-[[https://www.bundobook.co.kr/goods/view?no=1701|《나자렛 예수》{{{-2 (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요아힘 그닐카{{{-2 (Joachim Gnilka)}}}, 정한교 번역, 80-82쪽. 또 하나의 오해는, 예수가 종교적 개인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유다인이었으며,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늘 관건이었다. 따라서 종교적 개인주의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사와 종교사 그리고 종교의 구조를 보더라도 그러했다."{{{-2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246쪽)}}}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그리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2 (이사야 62장 5절)}}} 예수의 활동은 언제나 어디서나 '백성'을 향한 정향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개인을 향해 결단을 호소할 때도 그를 이 백성의 일원으로 바라본다. 예수의 구원 제시를 개인 치유로 이해한다면 몹시 오해가 될 것이다."{{{-2 (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 256-257쪽)}}} 물론 1세기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사두가이)과 어느정도의 긴장 관계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사제들과의 긴장은 바리사이 역시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바리사이들이 사두가이들과 긴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바리사이를 종교적 개인주의자 혹은 성전 혐오자로 볼 수 없듯이, 예수(그리고 그의 제자들) 역시도 성전 혐오자가 아니었다.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가 지적했듯이,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사가는 2장 17절에 시편 69,10을 인용하며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낸 일을 옳다고 평가한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제식을 맹렬히 비판하여 성전을 없애려 했고 성전제식을 모두 폐지하기를 원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말은 제식과 전례에 대한 거부감을 예수의 삶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가 한 번도 성전을 방문한 적이 없고{{{-2 (앞의 텍스트 외에 마르 12장 성전에서의 예수의 가르침 참조)}}} '성전 정화'{{{-2 (환전상과 가축 상인들을 몰아냄)}}}는 성전제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헌금이나 기부를 해야 할 거룩한 장소에서 돈을 긁어모으는 행위{{{-2 (가난한 과부의 헌금 대목[* 발췌자 주석: 이 부분에도 오해가 퍼져있는데, "이 텍스트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판하지 않는다. 주석가 중에는 예수가 과부를 사제들이 착취하는 희생양으로 묘사하려 했다고 여기는 이도 있다. 과부가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류에 빠져(!) 모든 것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남는 것만 헌금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나 텍스트에 그런 언급은 없다."{{{-2 (베르거, 같은 책, 169쪽)}}} "예수는 성전을 정화할 때 그곳에서 판치고 있던 장사꾼들을 몰아냈다. 성전은 돈을 긁어모으는 곳이 아니라 주는 곳인데, 그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서 바로 그렇게 한 것이다. 사도 6장에 의하면 성전은 과부들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배급받는 곳이다. 이렇듯 자선을 청하고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바로 그곳에서 그 가난한 과부는 관계를 확 뒤집어 놓는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내놓는다. 1베드 4,8과 잠언10,12 그리고 야고 5,20에 의하면 자선은 죄를 없앤다."{{{-2 (같은 책 169쪽)}}}] 참조)}}}를 금지한 것을 그렇게 왜곡한다. 이들 중 일부는 예수가 성전제식을 거부한 모습은 최후 만찬 예식에서 극에 달했다는 주장까지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하느님께 속죄하는 새로운 희생양으로 세우기 위해 빵과 포도주에 대한 말로 성전제식을 폐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제식은 속죄 제물과 속죄의 날{{{-2 (욤 키퍼)}}}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런 주석은 전례와 '제식 규정'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유다교 전례에서도,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도 목표가 같은 한 가지 길이 다른 길을 자동적으로 막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두 갈래 길은 서로 나란히 있다. 그리고 두 가지 길을 잘 활용하면 영적으로 유익하다. 유다교에서는 죄의 사함은 기도나 성전에 제물을 바치는 일뿐 아니라, 자선 행위로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대로 실행했다. 그러므로 대속을 위한 예수의 죽음이 그 자체로 성전의 역할을 없애리라는 뜻으로 여긴다면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히브리서도 예수가 이러한 이유로 대사제직과 하늘나라의 성전을 논증해야 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당연히 성전에 모였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평생 그곳에서 보냈다. >예수가 흘린 피{{{-2 (수많은 성전 제물 대신에)}}}가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다면, 성전제식을 그 피의 상징이나 재현으로 볼 수 있고 본질적인 것의 모사{{{-2 模寫}}}로 인정할 수 있다{{{-2 (히브리서가 말한 대로)}}}. 요약하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소중히 여겼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대부분의 유다인들과 더불어 예수도 성전을 소중하게 여겼기에 심판한다는 말을 성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로 표현했다.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예수는 결코 성전과 제식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예수도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스라엘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의 징조나 실제 상징으로 본 것이다. ...... 예수가 가시적 제식의 형상인 성인, 성전, 기도, 제물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예식을 거부한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복음에는 예수가 제식을 폐지하고 윤리만 내세우는 대목이 없다. 물론 예루살렘이 예수에게 두 얼굴을 보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루살렘에서 예언자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자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집이다.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예수는 성전도 당연히 사랑했다. >----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123-125쪽 >품위없는 것은 성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느님과 상종하는 형태다. 그렇다면 예수의 행동은 의식 변화를 부르짖는 열정적 호소, 회개의 호소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다른 제도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에 끼이게 되는데, 율법 관행인 안식일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폐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뜻에 맞게 재생시키고자 한 것과 마찬가지다.[* (책 속 주석)참조: J. Roloff, ''Das Kerygma und der historische Jesus (Göttingen 1970) 96: "이렇게 성전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안식일 계명에 대한 그것과 정확히 부합한다."] >---- >-[[https://www.bundobook.co.kr/goods/view?no=1701|《나자렛 예수》{{{-2 (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요아힘 그닐카{{{-2 (Joachim Gnilka)}}}, 정한교 번역, 370쪽. 그렇기에, 예수의 행적이 유대교와 완전히 구분되거나, 유대교를 완전히 뒤집으려는 시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유대교는 구약 성서에서도 이미 [[이사야]]서나 [[다니엘서]]나 [[요나]]서 처럼 일신론의 개방성에 주목한 신학 전통 또한 가지고 있었다.[* 일신교는 '우상 숭배'에 대한 적대에서 다신교와의 충돌이 있기는 하지만, 천하 사람들을 유일신의 자녀로 인식하기에 세계 시민적이고 평화 지향적인 면모가 분명하게 있다. 가령 "다니엘서는 야훼라는 신명 사용을 삼간다{{{-2 (9,2.4.13-14에만 나온다)}}}. 그 대신 '하늘의 하느님/주님/임금님'{{{-2 (2,18.19.37.44; 4,34; 5,23)}}}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구약 성경 중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 시기의 책들인 에즈라기·느헤미야기·유딧기·토빗기와 엘레판틴 유다인들의 서간에서 주로 확인되는 이 명칭을 통해, '''야훼는 이스라엘·유다 종교에 국한됨을 벗어나 보편적인 하느님으로 되시는 바, 그분의 주권이 모든 지상 통치자의 제국들을 대체한다. .. 야훼는 유배 중·후 시기에 보편적인 민족신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이스라엘 또는 유다의 '민족신'으로만 여겨져서는 안 되었다.''' 신명기 32,8-8에서 야훼가 이스라엘을 당신 몫으로 차지하시고 다른 민족들은 다른 신들에게 배당하셨다면, 이제 다니엘서에서는 이 관점이 바뀐다. 여기서는 세계 지배의 다른 모델이 설계되는바, 이에 따르면 모든 민족은 야훼에게 복속된 제후들이나 천사들에 의해 다스려진다. 이스라엘은 미카엘 천사의 다스림을 받는다(다니 12,1; 참조: 10,13). 7장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도 이 민족들의 천사들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는데, 야훼께서 그에게 통치권을 영원히 넘겨주신다." by 헤르베르트 니어{{{-2 Herbert Niehr}}}, "다니엘서", 에리히 쳉어{{{-2 Erich Zenger}}} u.a.,[[https://www.bundobook.co.kr/goods/view?no=12705| 《구약성경 개론》{{{-2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분도출판사 2012), 882-883쪽] [[예수의 성전 정화]]에서도 언급되는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같은 식으로. 예수는 완전히 독창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단 유대교 일신론의 개방성에 주목하는 신학의 계승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또 예수가 말한 죽은 자의 부활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기원전 3세기~1세기 유대교 특유의 신학이다. 사두가이들이 예수에게 부활 교리에 관해서 시비를 거는 장면[* 마태 22;23~33, 마르 12;18~27, 루가 20;27~40]이 있는데, 조로아스터교 이전의 유대교에서는 영혼 불멸 교리를 믿지 않고 죽은 자가 묻힌 곳에 영혼도 잠든다든가, 죽을 때 영혼도 사라진다든가 하는 식의 믿음을 가졌다. 예수의 주장은 우연이건 필연이건 유대교 특유의, 일신교가 가질 수 있었던 개방성과 보편성을 계승해 갖춘 결정체였다. 이러한 예수의 행적에 대해 신학자 [[존 도미니크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를 '갈릴래아의 견유'[* 犬儒, Cynic. 헬레니즘 철학의 한 사조였던 [[키니코스 학파]] 계열의 사상가. 이들은 들개처럼 사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견유라고 번역한 것이다. 인류 문명의 가치를 근원적으로 거부하고 철저한 무소유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은 세상을 떠돌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치료 행위를 했다고 한다.]라고 설명한다. 다만, 크로산은 자기 저서에서 각지의 여러 권위자들이 역사적 예수상을 재구성했지만 서로 모두 달랐다는 이야기 역시 함께 언급한다. [[역사적 예수]] 문서에서도 언급하고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말했듯 역사적 예수론이 해석하는 예수는 각기 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을 투영하는 것으로 빠질 위험이 있는데, 크로산을 비롯한 [[예수 세미나]]가 바로 이러한 케이스에 부합한다. Gred Theißen는 북미의 예수 연구 분위기를 (예수 세미나를 겨냥하여) ‘캘리포니아의 예수’라고 비꼬았다.[* Gerd Theissen & Annette Merz, 《역사적 예수》, 43][* 바로 이러한 점에서 19세기식 역사적 예수론이 큰 약점을 지녔는데, ㄱ. 종교적 개인주의 ㄴ. 성전에 대한 적대감 ㄷ. 탈교권주의 ㄹ. 이완된 율법 해석 등의 요소는 (비록 '이완된 율법 해석'은 19세기 계몽주의보다 훨씬 오래된 오해이지만.) 19세기 계몽주의가 '1세기 유다인' 예수를 통해 정당화하고자 한 자신의 이상향이다. 오늘날 예수 연구에서는 다음 명제를 매우 중요시한다: '''"나자렛 예수는 유다인이다."'''] 복음서들 중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카 복음서 셋과 [[요한의 복음서]]에서의 예수의 행적은 다소 차이가 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는 셋이 다소 비슷한 서술을 보이기 때문에 이 셋은 '공관 복음서'라고 부른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초반부는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전파하고 후반부에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루살렘과 시골 마을을 3번에 걸쳐 왔다 갔다 한다. 이 부분을 역사성을 반영해서 해석하면 공관 복음의 서술을 따르면 예수의 활동 시기는 불과 1년 이내인데 요한 복음서를 따르면 3년이 된다. 어디가 더 믿을 만한 서술인지는 [[진실은 저 너머에]]. 공관 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중 어디가 어느 부분에서 더 역사성을 담고 있는가는 근대 이후 신학에서는 오랜 논쟁거리다. 일단 공관 복음서의 저술 연대가 요한복음서보다 앞선다는 것에는 성서 주석학의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더 빠른 저술이 더 높은 역사적 정확성을 지녔으리라는 전제가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을 사실 기록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단순화해서는 안된다. " 공관 복음서의 저술 방식과 의도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 역사 비평적 방법에 대해 새로이 반성하고, 또 요한의 자료들을 더욱 차분히 연구한 결과, '''오늘날의 독자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 곧 ‘역사 아니면 신학’이라는 예전의 양자택일을 버리게 되었다. 요한복음서의 역사성에 대한 해답이 전에 생각하였던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라는 뜻이다.''' 우선 공관 복음서 저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이야기하는 많은 사실을 요한도 전한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 특히 [[세례자 요한]]의 활동,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일, 여러 기적, 그 가운데에서도 빵의 기적이 특히 이러한 부분에 속한다(1,19-51; 2,13-21; 6,1-21).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이야기도 전체적으로 마찬가지다(12─21장). 요한복음서와 공관 복음서의 해당 구절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요한 역시 교회 전통으로 알려진 사실들을 전하고자 하였으며, 또 그 일을 성실히 수행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여러 사항과 관련해서, 역사성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독창적 요소들이 요한복음서에만 나오는 경우도 있다. 곧 지리와 연대에 관한 자료들, 그리고 유다 지방이나 [[로마 제국]]의 제도와 관계되는 사항 등이다. '''이 모든 것은 저자가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티나에서 벌어지는 생활상을 잘 알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게다가 그러한 상황은 기원후 66-72년에 벌어진 유다 독립 전쟁 이후에는 없어져, 요한 복음서와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지게 된 것들이다.''' 이로써 요한이 자기의 작품을 예수님 역사의 실제적 상황과 관련지으려고 애썼음을 알 수 있다. 요한 복음서는 단순히 역사와는 관련이 없는 신학적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2 (한국천주교주교회의 [[https://bible.cbck.or.kr/Knbnotes/Intro/3104|《주석 성경》 요한복음서 입문]])}}}] 공관 복음서 역시 저자들이 그리스도론적 케뤼그마에 집중한 글인 데다가, 일단 상식적으로도 예수가 1년 이하로 활동했다고 가정하기는 너무 짧다. 일단 전통적인 독법에선 루카복음서에서 예수가 30살 즘에 공생애를 시작했단 구절과 요한복음서의 서술을 결합해서 예수가 33살을 살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